이른 아침 산책길엔 숲의 숨결이 남아있다. 한 낮의 다사다난을 밤늦도록 속닥거린 흔적이다. 키가 다른 나무들과 가지 끝에 달린 나뭇잎들, 분주하게 드나드는 작은 다람쥐들과 우듬지에 둥지 튼 새들이, 길가의 작은 돌멩이들까지 서로 다름을 품고 서로의 숨으로 서로를 읽고 있다.
밤의 그림자가 어릿어릿 남아있는 길을 걷는다. 나의 발소리에 놀랐는지 다람쥐 한 마리가 휙 돌아서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새벽바람은 이제 막 깨어난 여명을 흔들며 지나가고 이슬에 말갛게 세수한 작은 꽃나무가 파르르 떨며 바람에 화답한다. 바로 곁에 듬직하게 선 나무, 올려다보니 하늘에 가 닿은 듯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는 나에게 인사라도 하려는 것인지, 커다란 나뭇잎 하나 떨어져 어깨에 살며시 내려앉는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들여다본다. 구석구석 잘 살피면 이 숲이 밤새 주고받은 사연을 읽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투지 않고 서로의 허물을 탓하지 않는 이들의 셈법을 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무 그늘에 오래 머물던 어둠이 아침 햇살의 뒤로 밀려나는 것을 보며 이제 막 저문 지난 한 해를 돌아본다. 가까이 지내던 친구사이에 오해가 또 다른 오해를 낳아 답답하고 무거웠던 갈등,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의 끝이 보이지 않던 논쟁, 상대를 설득하려다 끝내 싸움이 되고 마는 한국의 정치적인 상황들이 지금도 가슴 한구석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해결하지 못한 이 미진함을 올해는 어떻게 풀어 나갈 수 있을까?
날이 밝아오며 산책길에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조깅하는 사람, 누군가 통화하며 화난 듯 걷는 사람, 아침마다 만나는데 눈길을 주지 않는 사람도 있다. 멀리서도 미리 알아보고 손을 흔들어 주는 노부부, 늘 그렇듯 다정하게 인사하며 지나간다. 서로 이름도 모르지만 나도 활짝 웃으며 화답한다. 잠시 스쳐 지나갔을 뿐인데도 마음이 훈훈해진다. 문득 지난가을에 만나 뵈었던 작가님 생각이 난다. 그분을 만나 뵙기로 하고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 뜻하지 않게 일행이 늘어났다.
그럼에도 작가님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우리 모두를 찬찬히 살피시고 소중하게 대해 주셨다. 그분과 보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모두 귀하게 다시 태어나는 것 같았다. 그분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나도 그분처럼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자고 다짐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어디로 가고 나는 예전처럼 쉽게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논하고, 심지어 남을 비난하고 있다.
숲의 숨결이 가득 담긴 산책길을 힘을 주어 꼭꼭 밟으며 걷는다. 그 숨결이 나의 발끝을 적시고 내 마음을 적시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 숨으로 내 일상을 살아 내고 싶다. 새해를 시작하는 첫 달, 첫 주에 새로운 다짐을 해본다. 오늘 하루, 단 하루만이라도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기로 한다. 오늘 하루를 그렇게 살고, 내일 다시 같은 다짐을 하자. 그렇게 한 달을, 한 계절을, 마침내 한 해를 살아 낼 수 있으면 나의 모습도 그분처럼 아름답게 빛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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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경옥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