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과 생각] 겨울의 길목에서

2025-12-18 (목) 07:23:13 김미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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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겨울하늘은 ‘햇빛도 우울하고 신비한 분위기다’라던 어느 시인의 글처럼 그러하다.
12월, 뉴욕의 추위에 몸을 움추리니 더 그럴거라고 생각한다.
겨울이 깊어가며 가는 곳마다 아름답게 장식한 크리스마스 츄리가 거리를 밝히고 집 앞을 고요하고 은은한 빛으로 안아 비춰주는 느낌이다.

이런 풍경을 바라보면 마음 한켠이 포근하고 따뜻하다.
연말이 되면 굳이 시간을 내어 한 해를 돌아보지 않아도, 순간순간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지난 시간을 떠올리게 된다.

돌아보면 흘러간 시간은 이미 멀어진 과거가 되고, 앞으로의 시간은 미스테리같이 여전히 불확실하지만, 정작 ‘선물 같은 오늘’은 얼마나 자주 놓치며 살았는지 문득 깨닫게 된다.


미국에서 친척 없이 단출한 가족만으로 살아간다는 건, 명절이나 행사가 찾아와도 모두가 한자리에 모이는 일이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고 형제들의 미국 방문도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한때 개구쟁이 같았던 오빠는 여전히 생각과 행동은 그대로지만 육체적으로 걷는 일조차 불편해 보이고, 어느덧 칠순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이 마음 한편에 안타까움으로 스며든다.

그럴 때마다 어린 시절의 장면들을 하나씩 끄집어내 보면, 그 시절이 주는 의미는 지나고 나니 분명히 그리운 시간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 겨울이 되면 새벽 공기를 가르며 집집마다 들리던 “찹쌀떡 ~ 쌍화차요~” 하는 정겨운 소리가 문득 떠오른다. 그런 날이면 아버지는 늘 찹쌀떡과 따끈한 쌍화차를 사셨다.

아버지가 드시고 남긴 쌍화차를 맛보면 달큰한 맛과 향이 혀끝에 퍼지며 세상에 이런 맛이 있나 싶어 참 좋았던 기억이다. 우리는 찹쌀떡을 나눠 먹으며 자연스레 가족 간의 정과 형제애를 쌓아갔던 것 같다. 눈이 내리면, 우리 형제는 마당에서 눈싸움을 하며 차가운 공기에 손발 끝이 시려도 마음으로 동요되는 어린시절은 참 따뜻했다.

웃음이 끊이지 않던 날들의 기억을 되돌려보니 순간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지탱해 준 힘이었던 것같다.

욕심보다 감사와 만족할 줄 아는 어른으로 커가면서 성숙한 어른이 되고 각자의 삶을 꾸리다 보니,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일상에 살아온 방식과 습관과 리듬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래서 서로에게 적당히 맞추고, 적당히 타협과 양보를 하며 맞추면서 살아가는 일이 필요해진다.
서로의 시간을 존중해주는 ‘적당한 거리’야말로 관계를 오래 지켜주는 사랑의 힘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혈육 간에 애정으로 의지하고 싶은 형제들도 예의를 지키고 존중해 주는 일, 주변 사람들과도 편안하게 잘 지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

미국서 살아오면서 누구나 있었을 어려운 시간들을 떠올리다 보면 삶을 지탱해 주는 건 결국 거창한 행복이나 기쁨이 아니라, 마음 한구석을 따뜻하게 밝혀주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던 작은 순간순간들임을 알아간다.

겨울은 모든 것을 잠시 멈추게 하지만, 그 안에서 쌓이는 기억과 온기들은 천천히 마음속에서 녹아 내린다.
겨울의 길목으로 가는 한해의 끝자락에서 또다시 다짐한다.

지나간 시간을 아쉬워하기보다, 지금 이 순간 내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의 하루하루를 더 소중히 아끼고 오늘을 더 잘 살아가야 한다고..
언젠가 오늘의 이 순간도 또 하나의 그리운 기억이 되어 회상할 테니, 주어진 오늘을 더 소중하게 아끼고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다.

<김미선/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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