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논단] 극우 담론의 부상, 세대 갈등과 낙인의 정치
2025-11-11 (화) 12:00:00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요즘 한국 사회에서 주류 언론과 소셜미디어를 보면 ‘극우’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최근 극우 담론의 부상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과 탄핵을 둘러싼 정치적 충돌을 계기로 국가권력, 민주주의, 국가 정체성 등 근본 가치가 진영 논리에 따라 재편된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이러한 갈등 구조 속에서 사회 일각의 분노와 불신·피해의식이 중첩되며 극단적 언어 사용이 온·오프라인 정치 공간 전반으로 확산됐다.
하지만 극우라는 말은 결코 가벼운 낙인이 아니다. 정치학에서 극우는 단순히 진보의 반대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를 부정하고 배타적 민족주의, 권위주의, 반자유주의 정서를 특징으로 하는 이념적 극단을 뜻한다. 서구의 극우는 인종 문제와 이민자 혐오, 반세계화 정서와 결합한 정치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극우라는 용어의 사용은 서구와는 다소 상이한 맥락에서 전개돼왔다. 냉전과 분단, 강대국 간 대립이라는 특수한 구조 속에서 극우는 안보와 반공·종북 프레임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최근에는 젠더 갈등, 온라인 플랫폼 미디어 확산과 맞물리며 독특한 방식으로 소비되고 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극우는 분단 체제 속에서 국가 정체성과 반공 이념, 도덕적 위기의식이 결합된 정서적·문화적 정치 흐름으로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맥락의 개념을 충분한 검토 없이 차용하다 보니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극우라는 말은 학문적 개념보다 정치적 수사와 낙인의 언어로 쓰이고 있다. 그 결과 보수와 극우, 애국과 배타주의의 경계가 흐려졌다. 더 우려되는 문제는 이 단어가 세대 담론과 결합하며 낙인의 언어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2030 남성의 극우화’라는 표현이 흔히 등장하지만 실제 데이터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한국정치학회가 6월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에서 자신의 이념을 0(가장 진보)~10점(가장 보수)으로 표시했을 때 8점 이상의 극우 응답은 20대 7.7%(20대 남성 7.4%)로 40대 평균(11.8%)보다 낮았다. 30대 남성의 경우 2점 미만 극좌 응답(18.3%)이 극우 응답(11.8%)보다 높았다. 50대 남성 중 10%, 40대 남성 중 12.8%가 스스로를 극단적 진보라 답했지만 우리는 이들을 ‘극좌 세대’라 부르지 않는다. 결국 ‘극우 청년’이라는 표현은 경험적 사실보다 담론이 앞서 만든 이미지일 수도 있다.
소수자 인권 인식에서도 청년층은 선행 세대에 비해 오히려 개방적 모습을 보였다. ‘성소수자 권리 보장 정책이 필요하다’는 항목에 20~30대 찬성률은 43.2%로 40대(36.5%), 50대(26.8%)보다 높았다. 이른바 ‘이대남’의 찬성률도 35.8%로 40·50대 남성보다 높았다. 복지 확대나 한미 동맹 등 전통적 이념 이슈에서도 세대별 극단적 차이는 뚜렷하지 않았다. 이 조사 결과를 보면 현 청년 세대는 단일한 이념적 극단 세력이 아니라 이슈별로 입장이 교차하는 복합적 정치 세대에 가깝다.
이러한 경험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극우가 청년 세대를 설명하는 언어로 쓰이면 사회는 세대 갈등의 프레임에 갇힌다. 최근 유행하는 ‘영포티’ 같은 표현이 그 단면이다. 젊은 세대는 ‘꼰대 문화’를 탑재한 4050을 비꼬고 4050은 2030을 ‘생각 없는 세대’로 몰아붙인다. 이런 조롱과 낙인의 언어가 ‘극우 대 반극우’의 진영 전선으로 번짐에 따라 정치 담론은 단순해지고 사회적 공감의 공간은 좁아진다. 한국에서 극우라는 현상이 실제로 얼마나 존재하는지는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 학문적·경험적으로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단어가 세대와 진영을 가르는 낙인처럼 쓰일수록 공론장은 좁아지고 대화의 문이 닫힌다는 점이다. 극우라는 말이 현실보다 감정 속에서 먼저 부풀어오를 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고 말의 극단 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극우의 부상’ 자체보다 서로를 정치적으로 단정하려는 언어의 습관일지도 모른다. 누가 더 옳은가를 따지기보다 왜 이렇게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게 됐는가를 돌아보는 성찰이야말로 정치와 세대를 넘어 공동체의 공존을 회복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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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