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요칼럼] 마음에 심으려고

2025-11-11 (화) 12:00:00 김영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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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확의 계절 가을이다. 추석 명절을 맞아 부모님의 묘소가 있는 원주의 공원묘지에 간다. 서울에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곳이다. 도심지를 벗어나니 황금빛 들녁은 잘 익은 벼 이삭이 수고한 농부에게 감사하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감나무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려 노란꽃 나무 같다. 밤나무에서는 가시 밤송이가 입을 벌려 갈색의 반질반질한 알맹이를 툭툭 떨구고 있다. 이 열매들은 누군가가 볍씨를 논에 뿌리고, 감나무와 밤나무를 산이나 밭에 심고 가꾸어 놓은 결실이다.

이 계절은 끝이면서 시작이고, 헤어짐이면서 만남이다.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기 위한 자연의 배려이며 조정 기간이다. 우리를 이 세상에 정성을 다해 정원을 가꾸듯 심어주고 가신 조상님의 묘지 앞에 형제들이 다 모여 차례를 지내고, 묘지에서 가까이 사는 동생 집에 왔다. 아름답게 가꾸어진 정원에는 대추가 빨갛게 익었다. 바비큐 하는 테라스 앞에는 지난해 돌아가신 어머니가 심어 놓은 족두리 꽃과 맨드라미꽃이 피고 지며 씨앗을 맺었다. 이름 그대로 족두리 꽃은 전통 혼례식 때 신부의 머리에 쓴 족두리 모양의 고상하고 아름다운 꽃이다. 어머니는 ‘새 각시 꽃’이라고 부르셨다. 건강과 방패의 꽃말을 가진 빨간 맨드라미는 닭의 볏을 닮은 독특하고 화려한 꽃이다. 평소 말이 거의 없는 남동생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서 그 씨앗을 정성스레 받는다. 그 모습을 지켜본 그의 아내가 묻는다“어디에 심으려고 그리 열심히 꽃씨를 받아?”그는 잠시 씨앗을 바라보면서 말했다“내 마음에 심으려고…”

그 말 한마디가 함께한 형제들의 가슴을 깊이 울렸다. 씨를 뿌릴 만한 마땅한 장소가 생각나지 않아 궁여지책으로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마음에 심는다는 건 무엇일까? 씨앗은 흙에 심어야 싹이 트고 꽃이 피는 법인데, 마음에 심는다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키우겠다는 뜻일 것이다. 어머니의 한량없는 사랑, 그 따뜻한 봄날의 기억, 단단한 흙을 고르고 씨를 뿌리던 그 손길. 그 수고와 아픔, 그것을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 씨앗을 마음에 심겠다고 했을 것 같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마음에 심는다. 누군가는 사랑을, 누군가는 희망을, 누군가는 미움을 심는다. 어떤 씨앗은 자라서 삶을 풍요롭게 하고, 어떤 것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콩 심은 데서 콩이 나고, 팥 심은 데서 팥이 난다.’란 옛말이 있지 않던가. 좋은 씨앗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준다. 그에 못지않게 씨앗이 어디에 떨어져야 풍성한 열매를 맺는지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그 선택이 결실로 말해 주는 가을에, 모든 사람이 사랑, 희망, 기쁨, 감사를 옥토 같은 마음에 심어 가꾼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 될까?

어머니가 뿌렸던 꽃씨는 자라서 이 한 해 피고 지고 있지만, 그녀의 성실했던 삶의 한 편이 꽃씨로 남았다. 동생은 그 꽃씨를 따서 그의 깊은 가슴에 심겠단다. 언젠가 그의 아들이 그 꽃을 다시 심게 된다면 그때는 단순한 꽃이 아니라 추억과 사랑과 삶의 의미가 담긴 꽃이 될 것이다. 멈출 줄 모르고 가는 세월, 나도 언젠가는 어머니처럼 떠나게 될 것이다. 손주들의 우주 같은 가슴에 심기고, 맺혀지게 될 것을 위해 내 굳어진 마음 밭을 고르고 고운 꽃씨를 받아두어야겠다.

<김영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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