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살림으로 뿌리내리다- 테이크루트 안미정 대표의 요리 이야기 (1)

2025-11-07 (금) 07:4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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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선영 1-쏘울 푸드와 정체성

살림으로 뿌리내리다- 테이크루트 안미정 대표의 요리 이야기 (1)
나에게 쏘울 푸드는 미역국이다. 딱 11년 전, 그러니까 아들이 태어나던 해에 먹었던 미역국을 나는 잊지 못한다. 아들은 예정일보다 3주 일찍 태어났다. 나는 아들과 나란히 누워 1인 회복실 천장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젖도 못 무는 이 작은 핏덩이를 두고 친인척 하나 없는 미국땅에서 어떻게 키우나 싶어 막막했고, 출산 후 찾아온 배고픔에 서러웠다. 그때 동네 언니가 슬로우 쿠커에 미역국을 한가득 끓여서 병실로 찾아왔다. 정신을 차리고  그 고마움을 어떻게 갚냐고 물었을 때 언니가 그랬다.
살림으로 뿌리내리다- 테이크루트 안미정 대표의 요리 이야기 (1)
살림으로 뿌리내리다- 테이크루트 안미정 대표의 요리 이야기 (1)




“자기야. 나한테 갚지 말고 나중에 똑같은 상황이 생기면 그때 그 사람한테 갚아.”


 미역국 한 숟가락을 크게 떠서 입에 넣기 전, 잘 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딱 죽을 것 같았지만 이 한 숟가락을 입에 넣으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걸 알았다. 요즘에도 기력이 다한 것 같은 날엔 미역국을 끓여 먹는다. 그 빚을 갚으며 잘 살고 싶어서. 



 그렇게 미국에서 나고 자란 아들이 벌써 11살이 되었다. 아들은 스스로 숟가락을 쥐고, 포크를 사용하면서 음식을 골라 먹게 되었고, 마음이 동할 때면 꼭 챙겨 먹는 음식이 생겼다. 그에게도 쏘울 푸드가 생긴 것이다. 아들은 자신의 쏘울 푸드가 계란 김밥이라고 말한다. 오감이 요란스럽게 예민하고 입이 짧은 아들은 온갖 재료가 섞여 있는 음식을 즐기지 못한다. 시금치, 당근, 우엉, 단무지, 햄, 계란을 한 번에 넣고 두껍게 싼 김밥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 계란만 넣고 만들어 준 김밥이 어느새 그의 쏘울 푸드가 된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생각나고, 학교 다녀와서 생각나고, 또 축구 연습 끝나고도 생각나는 그런 음식 말이다.



 그런데 얼마 전 아주 놀라운 경험을 했다. 아이의 친구 엄마들로부터 동일한 내용의 전화를 연달아 받은 것이다.



“아니 계란 김밥이 뭐야? 애가 나보고 계란 김밥을 만들어 달라네.”


 나의 계란 김밥은 화려한 기술이 필요한 음식이 아니다. 사실 기술보다는 아이에게 충분한 단백질을 공급하기 위한 엄마의 욕심이 담긴 음식이다. 얇은 계란 지단이 아니라 두껍게 지져낸 계란말이를 통째로 넣고 김과 밥을 말아낸 것이기 때문이다. 밥을 간장과 참기름으로 간한 것이 특이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간단하게 만들어 플레이 데이트 때 내어놓은 음식이 동네 아이들이 즐겨 찾는 음식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요즘 아이들의 쏘울 푸드가 냉동식품이라는 소식을 연이어 전해 들으며 안타까운 마음을 넘어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냉동식품이 쏘울 푸드로 자리를 잡아간다는 소식은 단순한 식습관의 변화가 아니라 관계의 부재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 쓰는 시간’이 사라지고 ‘손맛’이 삭제된 음식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음식, 즉 익명적 음식이다. 이 정체성이 없는 음식을 먹는 세대가 점점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 가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앞선다.  



 나는 냉동식품 세대가 이 정체성 결핍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손으로 음식을 만드는 행위가 이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손으로 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는 일이고, 이는 곧 한 사람을 살리는 일(살림)이자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해외생활 속에서도 나를 더 나답게 잡아 주는 미역국의 추억이 이 믿음에 확신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나보다 먼저 그 믿음을 꾸준히 실천하며 살림으로  깊게 뿌리내리신 분들을 직접 만나 그 내용을 기록하기로 결심하였다. 



 가장 먼저 <장선용의 평생 요리책>, <음식끝에 정나지요> 등의 책을 집필하신 장선용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계신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을 땐 지인분께 부탁하여 서둘러 날짜를 잡고, 선생님이 계시는 미국 북가주 프리몬트로 달려갔다. 



 2025년 8월 17일 일요일 오후 3시. 약속한 시간에 딱 맞춰서 도착했으나 선생님댁에 들어서서 깨달았다. 선생님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저이가 대장이지? 대장 이리 와봐.”



 선생님댁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대장이 되어 선생님의 서재로 불려 갔다. 

“이게 <산림경제(山林經濟)>라는 거야. 옛날 책인데 뭘 어떻게 하고 저렇게 하는지 여기 전부 다 쓰여 있어. 내가 책을 여러 개를 썼는데 책을 쓸 때 그냥은 못 써. 저 책에 보면 내가 중요하게 말한 걸 구성작가가 쪼끄맣게 노트같이 쓴 게 있는데 그런 걸 다 이야기하려면 이런 걸 다 공부를 해야지.”



 주방에 들어 서기도 전, 들고 나르기에도 버거운 분량의 책을 소개받았다. 

“앉아. 잡수셔.”

 서재를 지나 주방에 들어섰을 때, 장 선생님은 두텁편과 오미자 화채, 그리고 개성 약과를 내주셨다. 음식들은 각자의 개성이 똑 부러지게 드러나는 온기와 냉기를 품고 있었다. 나와는 다르게 흐르는 선생님의 시간이 이제야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약속한 시간에 꼭 맞춰 나타나는 것이 나의 차가운 시간이라면 선생님의 시간은 ‘마음 쓰는 따뜻한 시간’이었다. 약속한 시간 이틀 전 잣의 꼭지를 따고, 하루 전 오미자를 우리고, 약속 당일 떡을 따끈하게 쪄내는 마음. 보이지 않을 것 같던 그 마음의 시간이 오감을 통해 뚜렷해졌다. 그리고 바로 깨달았다. 이래서 음식 끝에 정이 나는구나!



 집으로 돌아와 선생님께서 진짜 잘 쓴 책이라고 소개해주신 <우리는 왜 비벼먹고 쌈싸먹고 말아먹는가(동아일보 한식문화연구팀 저)>를 가장 먼저 읽었다. 그리고 나서야 내가 아주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산림경제(山林經濟)> 책 말이다. 처음 선생님 댁에 방문했을 때 가장 먼저 소개해주신 <산림경제> 책을 어느 역사 시간에 들어 보았을 법한 저자의 이름과 책의 제목 정도로 생각하고 얼렁뚱땅 지나쳤던 것이다. 



 살림으로 뿌리내리는 이야기를 담는 이번 프로젝트의 시작은 <산림경제>였어야 했다. 그런데 선생님댁에서 가져온 책 중에 <산림경제>만 쏙 빠져있었으니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아차 싶어 늦게나마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이제야 그 책을 찾냐며 된통 혼났다. ‘그래도 그 귀한 책을 못 보면 제가 아예 시작도 못할 것 같아서요’라고 살살 빌며 선생님을 졸랐다. ‘며느리가 달라고 해도 안 주고 갖고 있었던 책’이라던 색 바랜 연홍빛 <산림경제>를 받아 들고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홍만선의 <산림경제(山林經濟)> 1권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의향에 따라 꽃과 대를 심고 적성에 맞추어 새와 물고기를 기르는 것, 이것이 곧 산림경제(山林經濟)이다.”

 했는데, 내가 그 말을 음미하고 뜻을 취해서 책 이름으로 삼는다.



 장선용 선생님의 경우는 다르다.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에 따라 사랑과 정성을 담고 취향에 맞추어 음식과 음료를 준비하는 것’, 이것이 곧 장선용 선생님의 ‘산림경제’였다. 



[장선용 선생님의 요리 레시피]

두텁편(멥쌀)

준비물: 멥쌀가루 10컵 꿀 3/4컵 잣가루 3/4컵 팥고물 3/4컵(X2)

멥쌀을 깨끗하게 씻은 뒤 물에 담가 불리고 충분히 불은 멥쌀을 소금 넣고 갈아 가루로 만든다.

멥쌀가루에 꿀을 넣고 골고루 섞고 체에 내린 뒤 잣가루를 넣어 섞는다.

시루에 면포를 적셔서 깔고 팥고물 반 컵을 깐다. 그 위에 물 내린 멥쌀가루를 얹고 다시 나머지 팥고물 반 컵을 얹는다. 

물이 펄펄 끓으면 찜통에 젖은 면포로 잘 감싼 시루를 얹어 김이 올라온 후 30분간 찐다. 

5분 정도 뜸 들인 후 꺼내 식힌 후 썬다.

팥고물 만들기

준비물: 푸른 팥(반 쪼갠 것) 4컵 황설탕 1/3컵 흰설탕 1/2컵 집간장 1큰술 계핏가루 약간

팥을 깨끗하게 씻은 뒤 물에 담가 불리고 손으로 비벼서 껍질을 벗긴다.

물에 헹구어 껍질을 제거한다.

찜통에 면포를 깔고 팥을 얹어 찐다.

뜨거운 상태의 찐 팥을 손으로 으깨 잘 으깨지면 체에 얹어 주걱으로 으깬다.

체에 내린 팥고물에 황설탕, 흰설탕, 집간장을 넣고 너무 눌지 않을 때까지 프라이팬에 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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