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은 나눔의 계절

2025-11-04 (화) 07:49:33 정성모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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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는 간밤부터 새벽까지 가을비가 내렸다. 여름비처럼 시끄럽지 않고 다정한 여인들의 밀어처럼 속삭이듯 얌전하게 내렸다. 비가 그치고나니 전형적인 가을 날씨로 변하여 텃밭에는 이슬이 오고가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땀을 덜 흘리고 더 편하게 텃밭가꾸기를 할 것 같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노라'고 했지만, 촉촉히 젖은 아침에 텃밭지기는 텃밭 벤치에 앉아서 빗물 젖은 채소의 숨결을 들으며 무아지경에 빠진다. 모든 잡념 내려놓고 조용히 멍 때리는 여유가 있음을 감사하게 여긴다.
텃밭은 생명을 살리는 곳이지만 작물은 땅에 심기만 하면 저절로 자라지 않는다. 재배기술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우리 인생살이와 비슷하다. 씨 뿌릴 때 씨 뿌리고 거름 줄 때 거름 주고 수확할 때 거두어야 한다. 이 모든 자연의 순리와 절차를 꼼꼼히 잘 챙기면서 정성스럽게 가꾸면 누구나 금손(green thumb)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똥손(black thumb)은 존재하지 않는다. 방법(how to farm)이 좀 부족할 뿐이다. 작물은 햇볕도 필요하고 빗물도 필요하지만 결국은 주인의 땀방울을 먹고 자란다.

텃밭을 가꾸다 보면 이런 생각을 느낄 때가 있다. 인생이란 이슬 먹고 아침에 싱싱하게 돋아나 푸르렀다가 저녁에는 시들시들해지는 채소와 같다. 백년을 살 것 같지만 희망사항일 뿐이다. 텃밭을 가꾸면서 삶의 지혜를 터득하기도 한다.

인간은 때가 되면 모두 지구와 하직한다. 지구에 머물고 있는 동안 건강하게 살려면 인공적인 첨가물 없이 자연 상태 그대로의 재료로 만든 천연음식을 섭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텃밭농사에 전력투구하는 목적과 이유가 자연 그대로의 식재료를 얻는 것이다. 진수성찬으로 잘 먹고 사는 것과 다르다. 이 세상에 나를 잃고서 얻어야 될 어떤 가치있는 성취도 없다. 나를 혹사시켜서 얻는 어떤 달콤한 업적도 없다. 제대로 된 섭생을 해야 육체건강도 지키고, 마음을 비우고 오장육부를 편하게 하면 정신건강도 지킬 수 있다. 설탕과 인공조미료가 없었던 시대에도 우리 선조들은 천연 식재료만으로 음식을 조리했지만 단 맛, 신 맛, 얼큰한 맛, 감칠 맛 등 깊은 맛을 냈었다.


음식이 생명이며(食卽命也 식즉명야) 음식이 하늘이다(食以爲天식이위천). 삶을 이어가는 것이 생명이며, 생명(命)을 이어가는 것이 음식(食)임을 생각하면 음식이 하늘이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940년 노드 노스본이 발표한 ‘땅을 생각하다(Look to the Land by Lord Northbourne, 1940)’ 책에서 ‘유기농업(Organic Farming)’이라는 용어를 세계 최초로 사용하였다. 인류는 빵만으로 살 수 없으며 충만한 삶을 위해서는 신성한 자연법칙에 복종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근시안적인 화학농업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이 의존하고 있는 정교한 생태계의 미래를 지속하기 위해서 유기농업의 삶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봄이 설렘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다투지 않고 내려놓고 자기 비움을 주저하지 않는 계절이다. 봄이 희망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고 아쉬움의 계절이다. 가을은 풍요의 낙원이고 그 풍요를 나누는 계절이다. 낙엽이 나뒹구는 쓸쓸한 가을이지만 풍성한 농작물로 허전함을 메우고 나눔으로 가슴을 채운다.

뭐니뭐니해도 텃밭지기에게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다. 가을은 땀의 마침표다. 봄부터 텃밭지기는 열매를 기다리면서 땀을 흘린다. 한여름에는 세 번 샤워하고 세 번 옷을 갈아 입어야 하루의 해가 녹두알 굴러가 듯 서산으로 넘어간다. 텃밭지기에게 열매는 기쁨이고 보람이고 땀의 결실이다. 열매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열매는 뭇사람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한다. 먹힘으로 행복한 것이 열매이다. 열매는 독식이 아니라 나눔이다. 나눔은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다. 나눔은 혈관에 피가 흐르듯 사랑이 흐를 수 있도록 길을 만들어 준다.

눈물도 지나치면 병(病)이 되고 사랑도 지나치면 독(毒)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눔은 나눌수록 여유로워지고 베푸는 마음은 사랑으로 승화한다. 베푸는 사랑은 아름답고 모든 것을 이긴다. 조건없는 사랑은 언제나 흐뭇하고 행복하다. 텃밭지기는 가을에 농작물을 거두고 남은 양은 작은 나눔을 통해서 유종의 미를 얻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차가운 겨울의 휴면기를 끝내고 새로운 생명이 움트기 시작하는 새봄이 되면 다시 텃밭으로 나간다.

<정성모 페어팩스,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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