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토제너리언(octogenarian) 이란 말이 있다. 80대의 나이가 된 사람이란 뜻이지만 흔히들 80대가 되었으니 마음의 여유를 갖고 너그럽게 세상을 살게 되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사실 80대가 되면 그동안 살아오면서 긴장하던 세가지의 걱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할 수 있겠다.
그 세가지 중 첫째가 건강이다. 신경을 물론 써야겠지만 살만큼 살았으니 여기저기 아프고, 잘 안들린다. 눈이 침침하다 등의 병치레에 덤덤하게 된다. 둘째가 유산이다. 이제 자식들이 다 컸으니 물론 다다익선이겠지만 자식에게 큰 재산 남겨 주겠다고 발버둥 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셋째가 경쟁이다. 그동안 좋은 학교에 들어가겠다고 벌였던 입시경쟁, 취업 경쟁, 직장 내에서 벌이던 승진 경쟁 등에서 해방된다.
나도 내 나이가 이제 80대 즉 옥토제너리언 그것도 중반이라서인지 이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을 갖고 서울에 3주간 갔다가 엊그제 워싱턴에 돌아왔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속으로 시시콜콜 흘겨보고 또 따지는 듯한 시선의 탐방이 아니라 서울 순례라고 감히 말하면서 말이다.
모국 순례 중에 강원도, 충청도 지방의 나이 든 분들의 생활 철학 그리고 마음의 여유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강원도 지방 장날에 한 할머니가 감자를 팔고 있었다. 한 소쿠리에 4천원이었다. 좌판을 벌이고 있던 그 할머니가 세 소쿠리 12,000원어치를 한 손님이 1만원에 달라 하니까 “보태 줘요” 하면서 거절했다. 충청도에서는 에누리하자는 손님에게 대답하는 한 할머니의 대답은 더 기막혔다. “됐네요. 섭섭하네유.” 와, 이 얼마나 멋진 대답인가?
TV나 신문에서 보면 매일 여의도 정치꾼들이 험한 단어를 써가면서 싸움박질을 하고 있는데 왜 이런 멋진 단어를 배워서 쓸줄 모르는지 아쉬웠다.
나는 7,000원짜리 이발소에서도 가고, 길거리 포장마차에서도 먹었는데 그 포장마차에서 “의자에 앉아 편히 드세요”라며 플라스틱 의자를 내밀던 꿀호떡을 굽던 아저씨의 미소도 꽤나 세련돼 보였다. 아침부터 손님이 물건은 안 사고 재수 없다며 소금을 뿌리던 시절은 이제 정말 옛날의 전설이 되었다.
나는 서울에 가면 강북 그것도 인사동 부근에서 먹고 자고 한다. 강남은 집값도 비싸고 명문 학군, 좋은 비즈니스 거리라 하지만 사람 냄새가 안 나는 메마른 동네라는 기분이 든다.
그런가 하면 인사동 옆에 익선동이 있다. 본래 조선조 시대에 내시들이 2교대로 항상 임금님 곁에 있어야 했으므로 궁의 지근거리에 살아야 했다. 지붕은 낮아야 했고 집 크기도 작아야 했다. 그곳이 이제 그 유명한 유럽 및 중동 음식 등을 파는 ‘먹자 거리’로 변했다.
내가 서울에 갈때마다 들르는 단골식당은 지리산 흑돼지 오겹살 집으로 늘 소주를 곁들여 먹곤 한다. 나의 서울 순례 마지막 코스이다. 이곳에는 여자는 여자, 남자는 남자들끼리 앉아 먹고 마신다. 까만 머리, 노랑 머리, 갈색머리 끼리끼리 앉아 소주를 마치 물처럼 마신다. 외국인들 틈에 섞여 앉아 있는 한국 사람들의 표정은 여유와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이제 한국은 최근의 ‘케이 데몬 헌터스’를 포함한 한류로 진정 세계문화의 중심이 된듯싶다. 내가 한국인임이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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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묵 문인/ 맥클린,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