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공항픽업부터 거처 마련, 직업알선까지 해준 ‘유학생의 대부’

2025-08-30 (토) 01:59:42 손수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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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가주한국의 소리 방송 박희덕 회장 인터뷰

▶ “샌프란시스코지역 한인사회를 위해 여러 일을 했습니다”

공항픽업부터 거처 마련, 직업알선까지 해준 ‘유학생의 대부’

박희덕장로가 지난해 4월 암 진단을 받은후 87세 생일을 맞아 오클랜드 스캇식당에서 가족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1962년 샌프란시스코에 첫발
상항지역 한인회 창립에 참여
가주한국의 소리 방송 첫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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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는 미주에서 처음으로 한인 단체의 활동이 시작된 곳으로 100년이 넘는 이민 역사를 지니고 있다. 상항지역이 지금의 한인사회로 발전, 자리잡기까지에는 많은 한인들의 수고와 봉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함경북도 청진출생의 박희덕씨(88. Daniel Park))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학과를 졸업(3회)후 1962년 2월 유학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왔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베이지역에 반세기 넘게 살아온 올드타이머로 한인사회를 위해 여러 많은일을 했다고 밝혔다. 인터뷰를 통해 어떤 일을 했는지 들어봤다.
공항픽업부터 거처 마련, 직업알선까지 해준 ‘유학생의 대부’

샌프란시스코지역 올드타이머로 인터뷰를 한 박희덕 장로(왼쪽)와 아내 박영희 권사. 지난 8월 23일 오클랜드에서 열린 88세 미수생일잔치에서 찍은 사진이다.


▲상항지역 한인회 창립 참여


한인들의 권익 옹호와 단합등 미래의 한인사회를 위해서는 상항지역한인회가 필요하다고 공감하여 한인회 창립에 참여했다. 이 당시 한인회 창립을 위해 김동우, 김치원, 송정율, 송선근, 전명선, 박희덕 등 6명이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국 식당에서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당시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상항감리교회 교인들로 교회중심으로 많은 일이 이루어졌다. 1965년 상항한인교민회로 정식으로 발족시에는 연장자인 김동우 옹을 초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박씨는 이 당시 한인들의 숫자는 3-4백명으로 기억된다고 말했다. 그 당시 LA지역에도 한인회가 없었으며 상항지역한인회가 미주지역 최초 한인단체로 활동을 하게 됐다. 5대 이민휘 회장이 한국에서 한국정부 지원금과 도네이션으로 10만달러를 갖고온 것을 계기로 한인회관 건립준비위원으로 참여,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지금의 한인회관을 구입하게 됐다.

그리고 80년대 초 알라메다에 거주하면서 미국 독립기념일 퍼레이드를 시작하여 한인들의 존재를 미국사회에 알렸다. 퍼레이드에는 꽃차에 한복을 입은 여성들이 탑승하고 앞쪽에서는 태권도 시범을 펼치기도 했다. 알라메다에서의 미 독립기념일 퍼레이드는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한국일보 시작

1969년부터 샌프란시스코 900 마켓스트릿에 조그만 사무실을 얻어 샌프란시스코 한국일보 시작에 참여 했다. 이 당시 김재성(초대지국장)과 김용관(녹용장사)등과 함께 1970년 5월 14일 한국일보를 설립했다. 그후 강우정(2대 지사장), 김근수 (나중에 편집국장)등과 함께 신문을 만드는 일에 나섰다. 이어 43 Rd Ave로 이전후 71년 5월 21일에는 Clement St로 이전하면서 독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샌프란시스코지역 로컬뉴스를 LA본사로 원고를 보내면 LA판에 실어 버스나 항공편으로 보내오면 이것을 픽업하여 독자들의 주소를 찍어 배달하는 체제이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지금까지 한국일보에 남다른 사랑과 애착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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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캘리포니아 한국의소리 방송개국 축하방송에 박희덕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한국의 소리 라디오방송

한국일보 창간에 관여한 후 1971년부터 동포들에게 고국과 로컬 소식을 알리기위해 캘리포니아 한국의 소리방송 (Voice of Korea in California, 회장 박희덕)을 시작했다.

박희덕 회장은 처음에는 KBRG FM 105로 1주일에 30분을 방송하다가 1년후에는 1주일에 한 시간으로 늘렸다. 방송은 멘트에 이어 ‘아리랑’으로 시작, 한국 뉴스와 로컬뉴스, 주부의 시간, 어린이 시간 등을 내보냈다. 그리고 임정빈 목사가 5분정도 말씀을 전하는 시간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인터넷이나 TV가 없던 시대라 방송이 애국가로 끝이 나면 동포들이 두고 온 조국과 고향을 생각하며 감격으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듣는등 높은 호응을 얻었다.

한국의 소리 방송 PD로는 강우정 한국일보 지사장이 많이 도왔다. 그리고 아나운서로는 권규민, 이기복(배재출신), 엄정화 등 4명이 맡아하고 황영일씨(이정근 목사 사위)가 엔지니어로 일을 했다. 또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의 단합과 친선을 위해 가주 한국의 소리방송회 주최로 친선 소프트볼 대회도 개최했다.

그리고 76년에는 샌프란시스코 골든게이트 팍을 빌려 한국교포운동회를 개최했다. 이 운동회에는 300여명이 참가하여 청군과 백군으로 갈라 한국식 운동회를 했다. 업체들의 후원으로 많은 상품을 참가한 동포들에게 나눠주어 즐거운 시간이 되었다.

또 한국영화를 본국에서 가져와 미국 극장에서 상영하는 일도 했다. 영화 필림은 총영사관을 통해 가져왔으며 입장료는 2달러. 그 당시에는 한국어 방송이나 영화를 기다리는 사림들이 많았다. 1971년부터 운영 하던 한국어 소리 방송은 1985년까지 15년동안 운영하다가 문을 닫았다.
공항픽업부터 거처 마련, 직업알선까지 해준 ‘유학생의 대부’

1980년대 알라메다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미 독립기념일 퍼레이드에서 박희덕씨(오른쪽)와 최금열씨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가족제공>


▲한인 유학생의 대부

1962년 미국으로 유학을 와 유학생들을 많이 도와 ‘유학생의 대부’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에 처음와서 샌프란시스코 마켓 스트릿에 있는 미국식당에서 한 시간에 1달러 50센트를 받는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유리창을 잘못 닦았다하여 하룻만에 해고를 당했다. 미국에 온 꿈이 하루에 무너지면서 박씨는 한국에서 오는 후배들이 이런 고충을 당하면 안되겠다고 생각해 유학생들에게 미국 생활 방법을 알려주면서 적극 돕기에 나섰다.

1964년부터는 샌프란시스코 Pine 스트릿 아파트의 메니저로 일을 하면서 한국에서 유학생이 오면 공항에서 픽업하여 한룸에 2-3명이 살수있도록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식당에서 접시 닦는법과 버스보이 등 미국생활을 잘 시작할 수 있는 방법도 ㄱ르쳐 주고 일할 자리도 알선해 주었다.

그리고 1975년에는 유학생들을 돕기위해 한미신용조합을 시작했다. 그 당시 이사 10명이 각 5,000달러를 출자하여 5만달러의 자본금으로 시작했다. 그래서 유학생 학비로 각 500달러를 이자 2-3%로 빌려주었는데 갚는 학생이 한명도 없어 2년만에 문을 닫았다.

이와같은 노력으로 한국외국대학교 총동문회로부터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공로패, 2002년에는 외국어대학교에 장학금을 보내 박철 총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88세 미수 생일 잔치

박희덕씨의 88세 미수생일잔치(미수연)가 지난 8월 23일(토) 오클랜드 잭 런던 광장에 있는 스캇(Scott’s)레스토랑에서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장로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알라메다 한인교회 주관의 생일 잔치에서 박희덕 장로는 “지난해 4월 암 판정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있는데 여러분을 뵈니 다시 살아난 것 같아 반갑다”고 인사를 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살아온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자 아내 박영희 권사(85, 이화여대 졸업)의 내조 덕분이라며 특별히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보니 너무나 짧다면서 기쁘고 즐겁게 살것을 권유했다.

박희덕 장로는 부동산 에이전트와 카워쉬 비즈니스에서 은퇴후 현재 샌리앤드로에 거주하고 있다.

박희덕 장로와 박영희 권사의 자녀는 장녀 Paula(진미)박을 비롯하여 주란, 주선, Michelle (진애)박 등 네딸과 다섯째로 아들 Mathew(민규)박 등 1남 4녀로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있다.

<손수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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