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창간 56주년 특집] 프란치스코 ‘개혁’ 유산… 레오 14세,‘전통’ 위에 세운다

2025-06-09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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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임 프란치스코 교황, 뚜렷한 개혁 노선 추구

▶ ‘빈자들을 위한 교회’ 선언… 이민·난민 보호도
▶ 신임 레오 14세, 전통과 격식에 무게·제도 정비

[창간 56주년 특집] 프란치스코 ‘개혁’ 유산… 레오 14세,‘전통’ 위에 세운다

올해 부활절 다음날인 지난 4월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왼쪽)과 신임 교황으로 선출된 레오 14세. [로이터]

세계 종교계, 바티칸에서 새로운 길을 묻다


지난 4월21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향년 88세로 선종했다. 선종 전날인 부활절 아침, 그는 오랜 병환에도 불구하고 성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휠체어를 타고 나와 신도들에게 마지막 축복을 전했다. 세계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을 애도한 가운데, 동시에 새로운 교황 시대를 주목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 점점 개인화되고 단절이 깊어지는 시대에,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종교가 우리에게 던지는 근원적인 물음은 여전히 깊은 울림을 남긴다. 신임 교황 레오 14세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전 세계의 시선이 바티칸에 집중되고 있다. <황의경 기자>

■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애와 업적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가난한 사제’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로서 교황 자리에 선출됐다. 그는 라틴아메리카뿐 아니라 남반구 전체를 통틀어 그 지역 출신 최초의 교황이자, 예수회 소속으로도 처음 선출된 인물이다. 또한 유럽 밖 출신 교황으로는 741년 시리아 태생의 그레고리오 3세 이후 약 1,200년 만에 나온 사례였다. 특히 바티칸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온 예수회 출신이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전환으로 평가받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전임자 베네딕토 16세는 약 600년 만에 자진 퇴위를 선언한 교황으로, 이로 인해 10년간 전·현직 교황이 함께 존재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전환 속에서 교황직에 오른 베르고글리오는, 성 문제 등 교리적 사안에서는 전통을 중시하면서도 가난과 불평등 문제에 있어서는 강한 개혁 의지를 드러내 보수와 진보 양측의 기대를 동시에 받았다. 그의 독특한 배경은 교회에 새로운 방향과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선출 직후부터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교황직에 임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는 교황 의자에 앉지 않고 서서 비형식적으로 추기경들을 맞이하며, 전통적인 권위에 얽매이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2013년 3월 13일, 성 베드로 광장을 내려다보는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평범한 흰색 복장을 입고 13세기 이탈리아 아시시 출신 성인인 성 프란치스코를 기리며 그의 이름을 교황명으로 선택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재임 기간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만큼 기록들로 가득했다. 그는 가톨릭 교회 내 개혁을 끊임없이 추진하는 한편, 전통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의 발자취는 단지 교황청 내부 개혁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적 이슈에 대한 윤리적 메시지를 담아낸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평가받는다.

■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장 뚜렷한 유산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라는 선언적 지향이었다. 교황으로 선출된 직후인 2013년 3월, 그는 교황으로서 첫 공개 연설에서 “가난하고 약한 이들 곁에 서겠다”고 천명했다. 바티칸 궁전이 아닌 게스트하우스 ‘산타 마르타’에 머문 선택은 권위보다는 섬김을 택한 결정으로, 전통적 교황상에 균열을 내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그는 고급 리무진 대신 작은 포드 포커스를 타고 다녔고, 금실이 수놓인 의복 대신 간결한 흰색 복장을 고수했다.

이런 상징적 행보는 단지 연출이 아닌 실천으로 이어졌다. 2015년 미국 의회 연설에서 그는 “정치 지도자들은 권력보다 봉사를 택하라”고 촉구했고, 2020년 팬데믹 한복판에서 빈 성베드로 광장에서 혼자 기도하며 “우리 모두가 같은 배에 타고 있다”며 연대와 회개의 메시지를 던졌다. 이 장면은 전 세계의 불안을 잠재우는 영적 장면으로 회자됐다.

교황청 개혁도 그의 주요 유산 중 하나다. 그는 방만하던 교황청 재정을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 회계 감사 시스템을 강화하고, 금융범죄와 관련된 내부 인사들을 단호하게 정리했다. 또한 2022년 발표된 교황청 조직개편안 ‘복음 전파의 사명(Praedicate Evangelium)’은 복음 선포를 교황청의 최우선 과제로 선언, 전통적 성직 중심주의에서 탈피해 평신도의 참여를 대폭 확대하는 내용을 담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종교 간 대화와 난민 보호 문제에도 적극적이었다. 2016년 시리아 난민촌을 방문해 무슬림 난민 12명을 직접 바티칸으로 데려온 행동은 종교를 초월한 연대의 메시지였다. 2019년에는 UAE를 방문해 이슬람 최고 종교지도자와 역사적인 공동선언을 발표하며 “신의 이름으로, 모든 폭력을 거부한다”고 천명하기도했다. 이는 이슬람권과 가톨릭이 공동으로 평화를 선언한 첫 사례로 기록된다.

이러한 행보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개혁 노선은 전통주의자들 사이에서 반발을 불렀다. 동성애자와 이혼자에 대한 포용적 메시지, 여성의 역할 확대 지지, 기후위기 대응 촉구 등은 가톨릭 내부 보수층의 반감을 산 것이다. 특히 2023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보다 열린 자세를 논의하자 일부 주교들은 “교회의 근간을 흔든다”며 반대 성명을 냈다.

■ 신임 교황 레오 14세와 향후 전망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 직후 소집된 콘클라베는 이틀간의 논의 끝에 2025년 5월8일 네 번째 투표를 통해 제267대 교황으로 미국 일리노이주 출신의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을 선출했다. 그는 교황 이름으로 ‘레오 14세’를 선택했으며, 이는 가톨릭 역사상 최초의 미국인 교황이라는 상징성과 함께 큰 주목을 받았다. 즉위 연설에서 그는 “이 시대의 교황은 판단자가 아니라 길잡이여야 한다”며 프란치스코 전임 교황의 개방적이고 목회 중심의 유산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다만 그는 보다 명료한 교리 해석과 제도적 정비에도 힘쓸 것으로 알려져, 조금 더 전통과 격식에 무게를 두겠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예수회가 발행하는 잡지 ‘아메리카’의 전 편집장인 토머스 리스 신부는 워싱턴포스트에 “(레오 14세는) 교황으로서 모습을 드러낼 때 보다 격식을 갖출 것이라고 본다”며 “(교황 피선 직후 성 베드로 대성당) 발코니에 나타났을 때 입었던 옷에서도 드러난다. 프란치스코는 대체로 즉석 발언을 했으나 레오 14세는 미리 준비해둔 텍스트를 갖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리스 신부는 이어 “레오 교황은 똑똑한 분이라고 생각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을 무작정 모방하려고 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프란치스코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과 함께 있다”고 평가했다.

레오 14세 교황이나 프란치스코 교황 모두 신학적, 교리적 입장은 비슷하며, 1960년대 제2 바티칸 공의회 이래 유지되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이어가고 있다. 여성 부제 서품 허용을 유보했고 여성의 신부 혹은 주교 서품은 명확히 반대했으나 시노드(가톨릭 교회의 대표자 회의)에 성직자가 아닌 평신도와 여성을 참여시킨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침을 레오 14세도 이어갈 것으로 전망된다. 또 기후위기 등 환경 문제 대응에 적극적인 태도와 이민자에 대한 관용적 태도 등 사회 문제에서도 같은 기조를 유지할 것으로 보이며,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와 불편한 관계가 이어질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교황청 공식 매체 ‘바티칸 미디어’가 새 교황 선출 이틀 뒤인 지난 5월10일 공개한 공식 초상사진에서 레오 14세는 새로 선출된 교황들이 전통적으로 해 온 복장대로 진홍색 모체타(mozzetta·어깨를 덮고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짧은 망토)와 화려한 자수로 장식된 영대(stola·목에 걸어서 가슴 앞에서 무릎 정도까지 늘어뜨리는 좁고 긴 띠)를 착용했다.

그는 명치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목에 건 끈을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가슴에 걸린 십자가는 일부만 드러났지만, 황금빛으로 빛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공개된 사진에서 그는 교황권의 상징인 '어부의 반지'를 낀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었다.

사진을 보면, 레오 14세는 전통적 교황 복장을 모두 따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통적으로 교황들은 실내외를 막론하고 진홍색 신발을 착용했지만, 그는 전임자 프란치스코처럼 검은 구두를 신었다. 이는 두 사람이 일반 교구 사제가 아닌 수도회 출신이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순명 서약과 정결 서약은 물론, 개인 재산을 갖지 않겠다는 ‘청빈 서약’까지 한 수도자들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가 예수회 출신이라면, 레오 14세는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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