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시초의 자유이고, 둘째는 최후의 자유이다. 시초의 자유는 인간 아담의 본능적 자유이다. 최후의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자유이다. 이 두 개의 자유 사이에 고뇌와 고난으로 가득 찬 인간의 길, 분열의 길이 가로놓여 있다.
인간의 자유를 주창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시초의 자유, 합리적인 자유밖에 몰랐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 최후의 자유가 숨어 있음을 알았다. 베드로가 예수에게 고백했다. ‘당신은 그리스도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참 자유를 얻었다.”
(베르쟈예프의 ‘자유’ 중에서)
자유에 대한 무지와 환영(幻影)으로 인류는 비참한 상황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이 큰소리치며 우크라이나를 마음대로 유린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무지가 낳은 비극이다. 삐뚤어진 세상을 인간의 잣대로 바로잡고 개혁하기위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이기주의적 착각은 자신과 이웃을 동시에 비극으로 이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유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평생 고민한 작가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 강제 수용소에서 4년 4개월간 영어(囹圄)의 몸으로 있으면서 ‘자유’에 관한 주제를 깊이 탐구한 작가가 되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대표작 ‘죄와 벌’도 역시 자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죄와 벌의 주인공이자 살인자인 대학생 라스꼴리니코프는 인간의 자유를 오해하고 오용한 대표적 인물이다. 라스꼴리니코프의 자유는 자신이 나폴레옹처럼 위대한 사람이라는 착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라스꼴리니코프는 스스로를 혁명가 혹은 정의의 표상인 것처럼 인식했다. 자기 인식의 변화는 엄청난 것이어서 라스꼴리니코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전당포 노파를 살인하고 은둔했다. 라스꼴리니코프가 가짜 자유인으로 전락하는 데는 단 30분이 필요했을 뿐이다.
살인자 지식인 라스꼴리니코프를 구원의 길로 인도한 소냐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회적 약자였다. 소냐는 자기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천박한 소녀이다. 소냐는 가난한 가정을 책임지는 여성 가장이다. 소냐의 내면은 성결했다. 소냐는 인품이 고상하고 눈빛은 맑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혼의 자유를 누리고 사는 보기 드문 신앙인이었다.
불안에 떨고 있는 라스꼴리니코프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말이나 설교보다 거룩한 모험이 필요하다고 소냐는 믿었다. 소냐는 이 거룩한 모험을 위해 예수가 자기에게 주신 ‘최후의 자유’를 사용하기로 결단한다. 라스꼴리니코프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소냐는 말했다. “나는 비천한 집 출신이나 믿음의 정상에 올라 군림하기를 원합니다. 거기서 당신이 빼앗긴 자유를 다시 찾기를 원합니다.”
이 말을 듣고 라스꼴리니코프는 소냐에게 요한복음 11장의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를 읽어달라고 말한다. 성경읽기가 끝나는 순간 라스꼴리니코프는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라스꼴리니코프는 자신의 죽은 양심과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했고 부활의 소망을 굳게 붙잡았다. 이것이 한 죄인이 예수의 은총 안에서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나는 신비한 과정의 좌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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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