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 몇 안 남은 토박이 노인 중 하나가 몇 달째 안 보인다. 등이 많이 굽고 듬성듬성한 흰머리에 도수 높은 안경을 낀 할머니다. 네 바퀴 달린 워커를 밀며 동네 길을 어정어정 산책하다가 마주치는 이웃들을 일일이 붙들고 날씨얘기를 시작으로 장광설을 늘어놨다. 독거노인들의 특징이다. 혹시 낙상해서 꼼짝 못하는 게 아닌지 궁금하다.
노인이든 젊은이든 오래 바깥출입을 못해 사회적 격리상태가 이어지면 자연히 ‘외로움 병’이 촉발된다. 나중엔 우울증, 고혈압, 치매 등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노인들에겐 한국과 일본에서 다반사인 고독사로 이어질 위험이 높다.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갈파했지만 외로움 역시 무시 못 할 저승사자다.
바이벡 머티 연방공중위생국장(서전 제너럴)은 코비드-19 팬데믹이 수그러든 2023년 5월 전체 미국인 성인의 절반가량이 상당 수준의 외로움을 겪고 있다며 ‘외로움 유행병 경고문’을 발표했다. 그는 외로움이 이들의 건강에 끼치는 폐해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지만 대체로 하루에 담배 15 가피를 피우는 것만큼이나 치명적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머티 국장은 외로움으로 인한 발병위험률은 치매가 50%, 뇌졸중이 32%, 심장질환이 29%라는 연구보고서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근래 급속한 기술발전으로 온라인 대화는 증가했지만 예전 같은 상면대화는 턱없이 줄어 군중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난다고 지적하고 외로움의 본령은 ‘인간유대의 양이 아닌 질’이라고 강조했다.
전 세계 142개 국가에서 15세 이상 1,000여명 씩을 대상으로 실시된 2023년 메타-갤럽 여론조사에선 응답자 4명 중 1명꼴인 24%가 외로움을 ‘매우 또는 상당히’ 느낀다고 답했다. 노인 응답비율이 가장 높을 것 같았지만 아니다. 첨단 테크놀로지에 민감한 19~29세 청년층이 27%로 가장 심했다. 십중팔구 ‘컴맹세대’인 노인들은 17%에 불과했다.
한창 일할 나이인 40대 응답자들 중에선 거의 절반이 외로움을 모르고 산다고 밝혔다. 외로움을 타는 노인의 비율이 낮은 것은 의외지만 위험성은 청장년보다 훨씬 높다. 외로워지는 계기가 대개 시각·청각·인지 등 신체기능의 저하, 운전능력 상실 혹은 교통편의 부재, 기억력 쇠퇴, 고질병, 배우자 사별, 은퇴 등으로 회복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겪는 노인들은 대개 티를 낸다. 잠을 많이 자거나 침대에서 오래 뭉그적댄다. 늘 권태로워하는 표정이다. 정해진 외부모임에 나타나지 않는다. 식욕이 늘거나 줄어든다. 매사에 무관심해서 전화벨에도, 옷차림에도 신경 쓰지 않는다. 세수와 목욕 등 개인위생 처리를 소홀히 하고 약도 제대로 챙겨 먹지 않으며 병원예약도 무시하기 일쑤다.
외로움 퇴치방법은 많다. 시니어센터·교회·도서관 등의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실버타운에 입주해 또래들과 어울린다. 음악·미술·서예·골프 등 취미생활에 몰입한다. 봉사활동에 참여한다. 특히 꾸준히 움직이는 게 좋다. 우리 동네엔 역시 네발 워커를 미는 할아버지 산책객도 있다. 허리가 앞으로 고꾸라질 듯 굽었지만 우리 집 앞을 매일 지나간다.
대개 외로움은 ‘loneliness,’ 고독은 ‘solitude’로 표현한다. 수필가 알프레드 폴가는 “모두가 당신을 떠나면 loneliness, 당신이 모두를 떠나면 solitude”라고 했고, 소설가 펄 클리지는 “loneliness는 블랙커피에 심야 TV, solitude는 홍차에 가벼운 음악”이라고 정의했다. 피치 못할 노년의 외로움을 기왕이면 loneliness 아닌 solitude로 겪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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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전 시애틀지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