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통영만큼 ‘고향’이란 상징성을 많이 지닌 곳도 없다.
‘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그러니만큼 바다빛은 맑고 푸르다.‘(박경리 소설 ‘김약국의 딸들’ 중)
통영 바다도 아름답지만 수많은 문인, 화가, 음악가 등 예술인들의 고향이거나 거쳐 간 곳이라서 사람들은 통영을 문화도시라고 한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시 ‘행복’ 중에서)는 유치환 시인이 있고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는 정지용 시인이, ‘새벽녁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싶은 곳이다’ (시 ‘통영2’ 중에서)는 백석 시인이, ‘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잠자리를 앵오리라고 한다/ 부채를 부치라고 하고 고추를 고치라 한다/우리 고향 통영에서는 통영을 토영이라고 한다’ (시 ‘앵오리’ 중에서)는 김춘수 시인도 있다. 뛰어난 문화 예술인이 극찬해 온 통영에 박경리(1926~2008) 작가의 묘소와 기념관이 있다.
지난 겨울 어느 새벽, 강남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 반만에 통영에 도착한 후 택시를 타고 박경리 기념관으로 갔다. 생전 작가의 취향대로 소박 단순하게 건립된 기념관 입구에는 책을 들고 있는 작가의 자그마한 동상(높이 1.4미터, 재질 동)이 서있다.
이 기념관에는 ‘토지’ 친필원고와 여권, 편지 등 유품이 전시되어 있고 벽면 전시실에는 그의 일대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박경리 선생이 평소 농사지으며 살던 강원도 원주(단구동)의 서재를 재현해 놓은 것이다. 남빛 두루마기가 벽에 걸려있고 앉은뱅이책상 왼쪽으로 재봉틀, 오른쪽으로 평소 사용하던 단아한 나무장이 놓여있다.
박경리 묘소는 기념관 옆 박경리 공원을 10여분 이상 올라가는데 언덕 사잇길에 작품 속 문장들이 바위, 나무, 바닥에 쓰여있다. 사람들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문장을 좋아한다.
선생의 유택에서는 한산만이 멀리 보인다. 선생은 젊어서 떠난 고향을 죽어서 돌아와 고향 바다를 바라보고 누워있다. 평생을 객지나 타국에서 떠돌아도 고향의 기운은 이렇게 강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나 보다. 그렇다면 뉴욕에 사는 한인 1세와 2세의 고향은 어디 있는가?
1980년대에는 한 해 2~3만 명의 한인들이 미국 이민을 왔고 이들의 이민생활은 40~50년이 되어가고 있다. 은퇴한 이들은 서울을 방문하면 자신의 생가나 살던 곳을 찾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민 1세의 고향은 멀리 두고 온 모국이라 하자. 그런데 뉴욕에서 수십 년을 살다가 타주로 이사 간 한인들은 뉴욕이 그립다고 한다. 매일 타고 다니던 7번 전철, 한글 간판이 가득 하던 유니온 스트릿이 생각난다고 한다.
지금의 한인들은 80~90년대 초창기에 몰려 살던 퀸즈 플러싱을 떠나 웨체스터, 롱아일랜드, 뉴저지 팰팍과 버겐카운티, 웨체스터 등 여러 지역에 퍼져 살고 있다. 1.5세와 2세 한인 성인 인구도 엄청 늘었고 3세들이 대학을 졸업하기도 한다.
2세들의 고향은 타인종 친구들과 뛰어놀던 플러싱의 좁은 골목길, 앨리폰드 팍이 있는 베이사이드, LA 갈비를 구워 먹던 롱아일랜드 바닷가, 추석맞이 대잔치 연예인 초청 공연이 열리던 키세나 팍… 어디라 할까?
이민 1세들은 어린 자녀에게는 선택권이 없던 미국이란 나라에서 인종차별이나, 소수민족의 설움과 함께 성장하여 자기 몫을 하고있는 2세들에게 다소 미안함이 있다.
모든 삶의 추억이 묻어있는 곳, 그렇다. 고향이란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무치게 그리운 곳이 아닐까. 그리운 사람이 있었고 살아생전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과의 기억이 있는 곳, 이 봄, 사무치는 사람이나 장소가 있는가? 그곳이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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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뉴욕지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