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한 것의 능력

2025-05-08 (목) 12:00:00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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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지난 다섯 달 새 국가원수가 다섯 번 바뀌었다. 정치적으로는 난세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의 됨됨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은 이런 때다. 내기 골프나 포커를 해 보면 사람의 바탕이 드러나는 것처럼. 난세에는 영웅도 태어나지만 위선자, 배신자, 모리배도 가려진다. 사전 준비가 엉망이었던 친위 쿠데타 뒤 많은 이들이 역사의 무대에서 조명을 받았다. 주인공은 물론 파면된 대통령이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의 거짓말이었다. 거짓말도 납득할 만하게 해야 한다. 현재진행형인 대통령의 거짓말은 여러 사람의 됨됨이를 드러냈다. 관료, 정치인, 장군들의 다양한 반응들, 법으로 밥 먹고 사는 이들의 민 낯도 잘 드러났다. 대통령의 수준에 대한 기대치를 확 낮춰 준 것은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반대편에서는 한 헌법 재판관이 점 조명을 받았다. 그의 말은 ‘대통령 거짓말’과 좋은 대조를 이뤘다. 이 판사에 대한 평가는 정치 성향에 따라 극과 극으로 나뉠 것이나, 그가 겪었다는 가난은 멀지 않은 옛 이야기다. 그는 고교 때까지 대중 목욕탕에 간 적이 없다고 한다. 목욕비가 없었다고 어릴 때 친구는 전했다. 당시 시골에서는 ‘목욕은 설은 한 번, 추석에 한 번’이라는 말이 있긴 했으나 일 년에 두 번도 목욕탕 갈 형편이 안 된 것이다. 그의 중학교 졸업 사진도 화제였다. 물려 받은 교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어서 교복에 붙은 이름표가 다른 사람 것이었다. 이 사진이 소셜 미디어에 돌면서 이틀 만에 180만 뷰가 넘었다. 가난에 낯선 요즘 청소년들에게 산 교육이 됐을 것이다.


판사의 이야기가 회자되면서 진주의 한 한약방 할아버지가 소환됐다. 판사의 오늘을 있게 한 사람이다. 이 어른의 도움으로 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한약방 할아버지는 60년 동안 많은 학생들의 학비를 도우면서, 지역사회의 문화 환경 인권 운동도 지원했다.

은퇴 후에는 사재를 정리해 대학에 기탁했다. ‘어른 김장하’를 치면 유튜드 등에 관련 스토리 수 십, 수 백 편이 올라 있다. “아프고 괴로운 사람들에게 번 돈이었다. 허투루 쓸 수 없었다”고 한다. “돈도 쌓아 두면 구린내가 난다”는 말도 남겼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우리 사회 곳곳에 이 어른 같은 이들이 적지 않다. 가난했던 한국의 소아마비 소년이 미국 대학의 교수가 된 것도 베품 덕이었다. 오하이오 라이트 주립대 최인홍 교수의 이야기인데, ‘바이올린 소리와는 가장 먼 곳에 있던’ 장애 소년을 오늘에 이끈 것은 30대 바이올리니스트의 재능 나눔이었다. 재활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며 난생 처음 꿈이란 걸 붙들게 됐다고 최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 바이올린 선생님은 나중에 LA로 옮겨와 살았다고 한참 전에 제작된 한 다큐는 전한다.

LA 한인단체 5곳이 공동 소유하고 있는 빌딩이 있다. 구입 당시 350만달러였던 이 건물은 지금 10배이상 올랐을 것이라고 한다. 이 빌딩이 이름 모르는 한 독지가가 가만히 내놓은 50만달러 체크 한 장이 종자돈이 되어 마련됐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기부자의 신원은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들려오는 이야기 중에는 이런 일이 적지 않다. 굳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아 묻혀 있을 뿐이다.

인간이 행복감을 느끼는 가장 높은 단계는 공헌감이라고 이야기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느낌. 세상의 칭송을 받지 않아도 그에 비할 수 없는 내밀한 기쁨은 나누는 이들의 몫이다. 받아도 보고, 나눠 보기도 한 사람은 받았을 때와 나눴을 때 기쁨의 차이를 안다. 도움을 받았던 이가 되돌려 갚는 소식을 듣게 되면 그 기쁨은 두 배가 될 것이다.

사람은 어쩔 수 없는 다면체, 다중 인격체라는 것을 살면서 깨닫게 된다. 같은 사람이 조금 잘 할 수도, 조금 잘못할 수도 있다. 잘한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요즘 같은 때를 사는 지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은 대선 정국에 접어 들었다. 대립과 갈등은 더 날카로워질 것이다. 요즘 미국 뉴스도 다르지 않다.

선한 것의 능력을 생각한다. 지금 같은 때 선한 이야기를 골라 듣고, 보면서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진주 남성당한약방 할아버지 이야기가 이 곳까지 알려지게 된 것은 서울의 탄핵 정국이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다. 선한 것은 힘이 세다. 베풀고 나누는 것의 힘과 영향력을 믿는다.

<안상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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