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저녁의 부력

2025-05-05 (월) 12:00:00 조형숙 수필가 미주문협 총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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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에이에 비가 많이 내렸다. 아홉 달에 와야 할 비가 이틀에 다 와 버렸다. 어둠 위로 빗물이 섞이면 하루의 일들이 모세관 현상을 보인다. 일상의 분주함에서 미쳐 느끼지 못했던 감정들이 물살을 따라 아주 미세하게 떠올라 온다. 종일 피곤했던 일들, 머리 써야하는 복잡한 생각들, 하고 싶었으나 그냥 가슴에 두었던 말들을 천천히 받쳐 준다. 오래 전 상처와 기억, 떠난 사람들의 흔적도 같이 온다. 유리창을 닦아 내리는 빗물이 안개처럼 가라 앉았던 옛 것들을 들춘다. 빗물 위로 떠오르는 옛 것 하나가 마음의 그물에 걸렸다.

어느 날 저녁 남편과 평소처럼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다. “잠깐만” 하고 서랍을 열고 작은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서 있었다. 모든 일에 스스럼 없던 사람의 주저하는 모습이었다.”이걸 써야 할 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됐어. 얘기해” 남편은 손을 귀에 가져가며 민구 스러워 했다. 보청기를 장만해 놓고 쓰지 않았었다. 내 얼굴을 바라 보는 큰 눈에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스며 있었다. 아내에게 보이기 싫어서 일 까. 자존심이 상하는 일 일까. 이야기를 들으며 알았다는 듯 끄덕이며 웃던 모습이 떠올라 온다. 건강하고 자신만만했던 젊은 시절의 모습과 달라진 지금을 보이기 싫은 것이었다.

나이 드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했다. 흐트러짐 없이 늙어가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TV소리가 너무 커요”라는 말에 “당신이 잘 들린다고 그렇게 말 할 수 있어? 내 귀가 잘 안 들리는 것을 알면서”. 많이 섭섭해 하면서 고개를 떨구고 방으로 들어 가던 등짝의 쓸쓸함이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보청기에 익숙해진 날 “이제야 제대로 대화를 할 수 있겠네” 하고 둘이 웃었다. 사실 내 귀에 문제가 없으니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남편 귀에 소리가 약하게 들리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지냈었다. 지금도 그의 마음을 배려 해 주지 못했던 미안함이 있다. 소리가 희미한 세상이 그에게 얼마나 큰 불편을 주었을 까. 다시 애잔 해진다. 보청기는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함께 했던 시간의 흔적이며 그와 말을 나누던 소통기기였다. 내게는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아무 소리도 담지 못하는 작은 것이 지금도 서랍 속에 그대로 있다. 내 이야기를 포함해서 그가 듣고 있던 세상의 모든 소리가 어두움의 뜸힘을 따라 선명하게 떠오른다.

저녁이 되면 세상은 차분히 내려앉고 저녁의 부력은 생각할 것 들을 준다. 강에 배가 떠 있는 모습, 하늘을 채우고 있는 구름과, 자기 순서를 기다렸다가 모습을 드러내는 초저녁 달을 생각 한다. 민들레 둥글고 하얀 꽃씨는 바람에 날려 공기 속을 떠다니고 있다. 땅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 공기를 가르고 훨훨 나른다. 모든 씨앗은 부력으로 올리는 희망이다. 등나무 등걸은 비가 오면 잎새가 나고 줄기가 자라나서 나무 기둥을 휘감아 오른다. 기어 오르는 것은 물의 부력으로 따사로움을 전하고 있는 것일 까. 푸른 빛과 붉은 꽃은 다 부력이 불러 오고 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마음이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바뀐다. 나무에 오르는 물기를 먹고 세상이 자란다. 자연과 인생들의 부력이 함께 어우러져 내일의 시간으로 흐르고 있다.

<조형숙 수필가 미주문협 총무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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