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조 필수추경에 “규모 부족·실기” 비판 줄이어…환율 탓 금리 인하도 지체
▶ 1분기 역성장 우려 커지지만 경기 대응 수단 마땅치 않아

기획재정부 김동일 예산실장(왼쪽 네 번째)이 지난 17일(한국시간) 정부세종청사 민원동 공용 브리핑실에서 2025년 추가경정예산안 상세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수 부진, 미국의 무분별한 관세 등 대내외 악재에 대응해 정부가 12조원을 긴급 수혈하기로 했지만 경기 침체 우려는 가시지 않고 있다.
추가경정예산안이 더 큰 규모로, 더 빨리 편성됐어야 했다는 지적이 줄을 잇지만 이미 바닥을 드러낸 재정 여력 탓에 당장 적극적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환율 불안에 기준 금리 인하마저 지체되면서 경기 대응 수단의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만 커지고 있다.
◇ 3년 만에 추경안 나왔지만…전문가들 "시기 늦고 규모 역부족"
20일(이하 한국시간) 기획재정부 등 관계 당국에 따르면 정부는 산불 등 재해·재난 대응, 통상·인공지능(AI), 민생 지원 등 3가지 분야에 12조2천억원의 재정을 긴급 수혈하는 추경안을 추진 중이다.
정부는 이번 추경안이 '필수 추경'이라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경기 부양을 위한 '대규모 돈 풀기'가 아니라 시급한 현안에 대응하기 위한 최소한의 재정 투입이라는 취지다.
하지만 최근 정치적 혼란에 따른 소비심리 위축,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장벽 등 대내외 악재에 비춰보면 이번 추경안의 규모가 발등의 불을 끄기에도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추경안 편성과 동시에 정치권에서 15조원 증액 주장, 2차 추경론 등이 뒤따르는 것도 이런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전망실장은 "올해는 경기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10조원으로는 전혀 대응이 안 될 것"이라며 "30조원 수준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추경 규모는 영남권 산불이 발생하기 전인 지난 1월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필요하다고 제언한 추경 규모(15조∼20조원)와 비교해도 적은 수준이다.
미국 트럼프 정부의 관세, 비상계엄 사태에 따른 정국 혼란 등 대내외 불확실성이 이미 작년 시작됐거나 충분히 예견됐다는 점에서 추경 대응이 너무 늦었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정부 예산안이 2년째 고강도 긴축 기조로 짜여 추가 악재에 대응이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 올해 초 내수 회복을 최우선 타깃으로 한 추경을 서둘러야 했다는 것이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추경이 시기적으로 늦었고 2월이나 3월에 이뤄졌어야 했다"라며 "올해는 최소 2번의 추경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적은 금액이라도 빨리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 추경에 소극적인 정부…왜?
정부가 추경에 적극적일 수 없었던 배경 중 하나로 역대급 세수 펑크와 대기업·고소득자 감세 정책에 따른 재원 부족이 꼽힌다.
여유 재원이 사실상 바닥인 상황에서 추경 재원은 적자 국채 발행으로 메울 수밖에 없다. 건전재정을 강조한 현 정부로서는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실제 이번 12조 필수 추경을 위해 발행해야 하는 적자 국채는 8조원이 넘는다. 전체 추경 규모의 3분의 2를 웃도는 수준이다. '필수 추경'이지만 나랏빚을 늘릴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은 3.2%로 상향 조정되면서 재정준칙 한도(3%)도 넘어서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건전재정 기조에서 한발 물러서면서까지 추경안을 편성한 것은 그만큼 지금이 심각한 위기 상황이라는 의미다.
양준석 교수는 "지금은 확실히 비상 상황"이라며 "잠재성장률 이하로 성장률이 떨어질 때는 추경을 통해 재정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확장 재정에 선을 그어온 정부가 3년 만에 추경 카드를 꺼내 든 것은 현 정부가 밀어붙인 '민간·시장 중심의 경제 활력' 기조가 사실상 성과를 내지 못했음을 자인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정부는 윤석열 전 대통령 당선 이후 지난 3년간 대주주 양도소득세 기준 완화, 대기업·고소득자 조세지출 확대, 상속세·종합부동산세 완화 등 이른바 '부자 감세'로 비판받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왔다.
재정 의존을 최소화해 재정수지를 개선하는 동시에 민간의 투자·소비를 유도해 거시 경제의 활력을 높이겠다는, 이른바 '낙수효과'를 염두에 둔 구상이었다.
정부가 지금까지 추경 편성에 선을 그어온 것도 이런 정책 기조와 관련이 깊다.
하지만 애초 정부의 기대와 달리 한국 경제는 내수 부진 장기화와 청년 고용 부진의 늪에 빠졌고 비상계엄·탄핵, 미국 관세 등 대내외 악재까지 직면하게 되면서 결국 추경을 피할 수 없게 됐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번 추경안은 정부가 그동안 해야 할 일들을 건전재정이라는 미명 아래 미뤄놓고 하지 않다가 마지막에 시늉만 하고 끝난 것"이라고 꼬집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급격하게 늘어난 국가채무를 고려하면 저출산 고령화 등 중장기 재정 소요를 감안해 최대한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정부 안팎에서 제기된다.
특히 추경은 성장률 제고가 아닌 시급한 현안 대응을 위해 최소한 규모로, 단계적으로 편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창용 총재가 지난 17일 추경과 관련해 "구조적으로 재정적자로 연결되지 않도록 일시적 지출로 한정해서 하면 좋겠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 역성장 전망에도 기준금리 동결…정책수단 '공백'
추경의 경기 마중물 효과에 물음표가 찍히는 상황에서 최근 환율 불확실성으로 통화정책의 입지마저 좁아진 점은 더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한은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 17일 2분기 첫 통화정책 방향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연 2.75%로 동결했다.
관세 충격에 따른 경기 부진으로 기준금리 인하 필요성이 대두됐지만 환율의 높은 변동성이 발목을 잡았다는 평가가 나왔다. '1분기 역성장' 가능성까지 점쳐지는 상황에서 재정·통화정책 모두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하기 쉽지 않은 셈이다.
미국발 관세 충격이 본격화하지 않은 시점에서 역성장이 현실화하면 이는 본격적인 경기침체(R·Recession)의 서막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비상계엄으로 고꾸라진 소비 심리는 더 얼어붙고 청년들의 취업 문은 더 좁아질 수 있다.
주원 실장은 "경기 침체는 사실 작년 2분기부터 이미 시작됐다"라며 "통화정책도 재정 대응도 늦었다"고 말했다.
허준영 교수는 "차기 정부가 경제정책에 대한 비전을 제대로 보여줘야 경제 주체들의 심리를 긍정적으로 자극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