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독서칼럼] ‘자유에 관하여’

2024-12-09 (월) 08:04:12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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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시초의 자유이고, 둘째는 최후의 자유이다. 시초의 자유는 인간 아담의 본능적 자유이다. 최후의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적 자유이다. 이 두 개의 자유 사이에 고뇌와 고난으로 가득 찬 인간의 길, 분열의 길이 가로놓여 있다. 자유를 주장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시초의 자유, 합리적인 자유밖에 몰랐다. 베드로는 그리스도 안에 최후의 자유가 숨어 있음을 알았다. 베드로가 예수에게 고백했다. ‘당신은 그리스도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때 베드로 참 자유를 얻었다.”(베르쟈예프의 ‘자유’ 중에서)

자유에 대한 무지와 환영(幻影)으로 인해서 인류는 비참한 상황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러시아의 푸틴이 큰소리치며 우크라이나를 마음대로 유린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무지가 낳은 비극이다. 인간의 자유롭게 살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착각은 자신과 이웃을 동시에 비극으로 이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유에 관한 주제를 가지고 평생 사고하고 고민한 작가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옴스크 강제 수용소에서 4년 4개월간 영어의 몸으로 있으면서 ‘자유’에 관한 주제를 심층적으로 탐구한 작가가 되었다.


‘죄와 벌’의 주인공이자 살인자인 대학생 라스콜리니코프의 자유는 아담이 가졌던 본능적 자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 본능 안에 숨어있는 무의미, 무가치, 무기력, 절망감, 이기주의가 본능적 자유에 불을 붙인다. 이 이기주의적인 자유는 마침내 살인을 낳았고 라스콜리니코프를 파멸로 이끈다. 라스콜리니코프는 가짜 자유인이었다.

살인자 지식인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의 길로 인도한 소냐는 사회적 약자, 피해자였다. 하지만 소냐는 영적 자유의 투사였고 삶의 지고한 의미를 터득한 진리의 증인이었다. 한 영혼을 구원을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어떤 고상한 지식이나 설교보다 거룩한 모험이 필요하다.

소냐는 이 거룩한 모험을 위해 예수가 주신 최후의 자유를 사용하기로 결단한다. 소냐는 말한다. “나는 비천한 집 출신이나 믿음의 정상에 올라 군림하기를 원합니다. 거기서 당신이 빼앗긴 자유를 다시 찾기를 원합니다.”

옴스크 감옥에 도착한 후 얼마 안 되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뜻밖의 일이 생겼다. 제까브리스뜨에서 온 전도 부인들이 건네 준 성경을 진지하게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그는 자신이 깨달은 성경 구절을 옆에 있는 죄수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죄와 벌’ 마지막 장면에도 소냐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진지하게 성경을 읽어주고 설명해 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시선이 한 구절에 오래 멈추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

그 성경 구절은 요한복음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 성경구절이 라스콜리니코프를 본능적 자유인으로부터 영적 자유인으로 변화시켰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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