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해가 저물어 간다. 창 밖에 솔솔 내리는 첫 눈을 보며 미루어 두었던 빨래를 세탁기에 넣은 후 서둘러 베란다의 꽃나무들을 실내로 옮기느라 바쁜 와중에 전화벨이 울린다.
일상생활에서 매번 느끼는 습관중에 고쳐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실천은 어려운 일들이 있다, 항상 일들을 미루어 두었다가 허덕이듯 한꺼번에 모아 처리하는 나를 보고 남편이 이따금 잔소리 같은 핀잔을 주는데 카톡이 울린다. 이웃에 살고 있는 친언니의 고교동창이다. 10여년 오랜세월 가까운 거리에서 여러모로 친분을 다져온 터라 멀리 살고있는 내 언니를 대신해서 이제는 나도 모르게 격의없이 일상 생활의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친구처럼 지내고 있다.
오늘 동네 스시집에서 점심식사를 함께 하자는 제의를 받고 부랴부랴 일을 끝내고 식당에 먼저 가서 창가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곧 이어 언니 내외가 들어 오는데 몇 달전보다 느린 걸음걸이와 쳐진 어깨가 세월을 비켜갈 수 없는지 앉자마자 내뱉는 언니의 “아이고” 소 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대체로 이 나이가 되고 보면 누구나 그러하듯 모이면 하는 소리가 건강 이야기로 시작해서 건강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 간의 안부를 서로 묻는가 하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미국내 사정이랑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려스런 세상 이야기들을 장황하게 늘어놓다가도 끝내는 서로 건강을 다지자고 입을 모은다.
담백한 점심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와 메릿쯔빌 도로를 건넌다. 우리 집이 보이는 언덕위의 산책로를 걷노라면 누가 심었는지 앙상하게 두 그루의 개암나무가 서 있다. 익을대로 익어 가느다란 가지마다 매달려 있는 쪼골 쪼골하고 달달한 속살의 개암나무 열매를 한 웅큼 따서 입에 넣는다. 감도는 떨떠름한 뒷맛에 한 바탕 웃으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공유하기도 하고, 발밑에 사각거리는 낙엽의 노래를 들으며 늦가을의 향내를 음미한다.
커피로 마른 목을 축일 겸 마을 어귀에 있는 클럽 하우스에 들러 아직도 남아 있는 수다를 떨고 있는데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창가의 소파 위에 스마트폰을 누군가 두고 갔는지 얌전하게 놓여있어 열어보니 요행히 한국사람의 폰이다.
조금 전 우리가 들어올 때 산책길에서 자주 만났던 동네의 한 한국사람과 인사를 주고 받은 생각이 났다. 무작정 그녀집으로 달려가 초인종을 눌렀다. 우리가 산책하면서 애칭삼아 “덜렁이”라고 부르던 동네 친구로, 역시나 자신의 폰을 분실한 줄도 모르고, “어머, 어머, 이게 왜 그곳에 있었지”라며 서둘러 잃어버린 폰을 찾아준 나를 무색케한다. 그야말로 천하태평으로 너스레를 떠는 “고맙다”는 인사를 등뒤로 하고, 그녀의 해맑은 웃슴소리에 기분좋은 일이라도 한듯 내심 미소를 지어본다.
어느듯 언니 내외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는데 빨간 단풍 잎 사이에 걸려있는 둥근해가 석양에 곱게 물들어 있다. “언니야, 다리 하나 들고 균형잡기 운동 잊지 말아요.” 노년의 늦가을 해가 짧게만 느껴지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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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메리옷쯔빌,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