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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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2024-11-12 (화)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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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
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
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
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 내어
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것이 다 사람이 만든 길이
거꾸로 사람들한테 세상 사는
슬기를 가르치는 거라고 말한다
길이 사람을 밖으로 불러내어
온갖 곳 온갖 사람 살이를 구경시키는 것도
세상 사는 이치를 가르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래서 길의 뜻이 거기 있는 줄로만 알지
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것은 모른다
길이 밖으로가 아니라 안으로 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만 길은 고분고분해서
꽃으로 제 몸을 수놓아 향기를 더하기도 하고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이 땀을 식히게도 한다
그것을 알고 나서야 사람들은 비로소
자기들이 길을 만들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만들었다고 믿는 길이 우리를 가로막을 때가 있다. 큰물이 나서 다리가 떠내려가거나, 산사태가 나서 길 앞을 막을 수는 있다. 그러나 아무도 강물이나 연약한 지반을 원망하지는 않는다. 사물을 움직이는 물리법칙에는 윤리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 믿음으로 닦은 공동체의 길이 무너질 때는 벽돌 쌓듯 무심하게 복구하기 어렵다.‘길이 사람을 밖에서 안으로 끌고 들어가’ 차마고도보다 위태로운 마음과 욕망의 지도를 들여다보게 하는 시절이다. [시인 반칠환]

<신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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