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선진국인가, 후진국인가, 대한민국은…

2024-09-09 (월) 옥세철 논설위원
크게 작게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라고 하던가. 지난 500여 년의 세월을.

그 원년은 포르투갈 출신 바스쿠 다 가마가 이끈 선단이 희망봉을 거쳐 인도 남부지역에 도착한 1488년으로 잡는다. 이후 펼쳐진 것은 유럽열강의 일방성의 아시아 지배 역사다.

‘아시아의 급속한 경제성장, 그리고 그와 맞물린 글로벌 파워의 재분배. 이는 동방(아시아)에 유리하게 작용하면서 유럽-아시아관계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지의 지적이다.


다름이 아니다. 서세동점의 시대가 끝나고 부분적이나마 그 역현상이 일고 있다는 이야기다.

사실 새로울 것도 없다. 아시아의 주요 국가들이 세계 경제의 파워 하우스로 부상한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2차 대전 후 유럽 역내에서 벌어진 가장 큰 전쟁이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와 함께 ‘미국에 맞서는 중국의 첫 대리전쟁’으로 인식되면서 더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는 그 관계역전 현상에 이 잡지는 새삼 주목한 것이다.

아시아는 오랜 세월 유럽 열강의 전략적 계산의 대상이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불거진 사실은 그와 반대다. 거꾸로 ‘아시아의 주요 강국’들이 유럽을 자신들의 전략적 야심을 펼칠 무대로 삼고 있는 것이다.

포린 폴리시지가 지목한 아시아의 주요 강국들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전쟁 수행을 암암리에 돕고 있는 중국, 그리고 인도 외에 IP4(인도-태평양 파트너 4개국)로 지칭되는 한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이다. 특히 주목을 받고 있는 나라는 ‘방산 강국’으로 급속이 부각되고 있는 한국이다.

노르웨이, 핀란드, 라트비아 등 북유럽지역에 이어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 등 동유럽지역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회원국들에 대한 방산수출을 확대해왔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도 강화해왔다.

그러니까 러시아와 대립상황에서 나토의 최전선 강화에 한국이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로 부상하고 있는 사실을 이 잡지는 조명한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지도 비슷한 지적을 하고 있다. 나토 창설 75주년 워싱턴 회의를 보도하면서 대서양과 인도태평양지역을 연결하는 핵심 고리로 IP4를 지목, 특히 한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이코노미스트지가 제시한 것은 G7(주요 7개국) 확대 안이다.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 등 독재체제 쿼드의 위협에 맞닥뜨리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의 안보와 아시아의 안보는 직결돼 있다.

이 같은 군사지정학적 대변화를 맞아 한국, 호주 등을 맞아들여 G7을 확대, 유럽과 인도태평양 동맹국들이 함께 경제, 정치, 군사적으로 대처해 나갈 때가 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G7을 확대, 개편해야한다’- 이는 이코노미스트지의 목소리만이 아니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미국의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등 유수한 싱크 탱크, 그리고 현 바이든 행정부는 물론 트럼프 전 행정부의 고위 당국자들도 그 필요성을 역설해왔다.

유엔은 러시아와 중국의 횡포로 사실상 뇌사상태에 빠져들었다. 이 정황에서 G7은 유일하게 국제질서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는 다자 협의체로 평가되고 있다.

문제는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 등 G7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낮아진 것이다. 또한 유럽에 편중돼 있다. 그런 한계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도-태평양지역 국가인 한국을 가입시켜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은 더 이상 변방의 약소국가가 아니고, 자유세계에 대한 진정한 지분을 가지고 있는 강력한 국가가 됐다는 것이 이들의 하나같은 지적이다.

타당한 평가일까. 크게 틀리지 않아 보인다. 경제적으로 10대 강국이다. 군사적으로도 5대 강국이다. 거기에다가 한류의 세계화와 함께 문화강국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그러나 어딘가 2%(어쩌면 20% 일지도 모른다) 부족한 게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좀처럼 과거에서 못 벗어나는 한국 사회의 집단의식구조가 ‘선진 대한민국’으로서 스스로의 자리매김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관련해 흥미로운 조사결과가 나왔다. 서울대 ‘글로벌 한국’ 연구진의 최근 조사로 70대 이상은 개발도상국, 50~60대는 중진국, 30~40대는 상위권 중진국, 10~20대는 모태 선진국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같은 집단 의식구조 때문인가. 한국은 국력에 걸 맞는 주장을 하지 못한 채 ‘외교적 모호성’ 뒤에 숨어 그 때 그 때 상황에 순응하는 선택을 해왔다. 그 결과는 중국에 휘둘리면서도 자유진영 속에서도 확고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어정쩡한 한국의 정치, 외교적 위상이다.

과거에 매몰된 의식구조, 그 중증의 증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야권이다. 걸핏하면 내미는 게 폐쇄적 민족주의에, 반일(反日)카드다. 그런데다가 민주화된 한국 사회를 과거 군사정권시절로 오도하며 상대를 극단적으로 악마화 한다. 이재명의 사법리스크가 커지면서 그 증세는 난데없는 계엄령 설을 퍼뜨리는 등 혹세무민의 병리화 현상마저 보이고 있다.

삼성전자나, BTS인가, 아니면 문재인, 더 나가 이재명 보유국인가. 어느 것이 한국의 진정한 민얼굴일까. 아무래도….

<옥세철 논설위원>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