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음하는 국민,‘연리지 정치’ 어디에 있나?

2024-08-15 (목) 서정명 서울경제 디지털 총괄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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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고 기품 있는 숙녀 리사베타는 청년 로렌초를 연모했다. 하지만 리사베타의 오빠들은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지자 로렌초를 몰래 살해한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로렌초의 망령은 리사베타의 꿈에 나타나 억울하게 묻힌 장소를 알려준다. 리사베타는 연인의 머리를 땅에서 꺼내 동백꽃 항아리에 넣어두고 매일 눈물을 떨군다. 이 사실을 안 오빠들이 항아리를 빼앗아 버리자 슬픔에 잠긴 리사베타는 결국 죽고 만다. 나중에 누군가 이런 노래를 지었다.

“내 동백꽃 항아리. 누가 가져갔나. 그 나쁜 사람은 누구일까.”

14세기 조반니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에 나오는 한 토막이다. 유럽 전역에 페스트가 엄습할 때 인간 군상의 위선과 사회 부조리를 날카롭게 꼬집었다. 단테의 ‘신곡(神曲)’에 빗대어 이 작품을 ‘인곡(人曲)’이라고 부르는 것은 휴머니즘 사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을 이동해 지금의 대한민국을 들여다보자. 언덕 너머에는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고 회색 코뿔소가 몰려오고 있다.

백악관은 12일 이란이 이스라엘을 조만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중동의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면 수출과 무역으로 경제를 지탱하는 한국은 밑동부터 흔들릴 수 있다. 국제유가 급등에 물가가 치솟고 해상 물류 차질로 기업들의 수출 전선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11월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든 민주당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집권하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자국 보호주의는 더욱 거세질 게 뻔하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자국 이익을 우선하는 ‘MAGA’의 예리한 칼날을 휘두르며 모든 수입품에 10% 보편 관세를 매기고 자국 기업에 대한 법인세는 내리겠다며 벼르고 있다.

특히 중국 제품에 대해 60~100%의 관세를 부과하기로 했는데 이는 총수출 가운데 중국 비중이 20%에 달하는 한국 경제에 더블펀치로 다가올 것이다. 이에 더해 미국 고용시장이 얼어붙고 실업률이 높아지면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한꺼번에 0.5%포인트 기준금리를 내리는 ‘빅컷’에 나설 수 있다는 우울한 전망도 나온다.

사정이 이런데도 22대 국회는 ‘먼 산 불구경’이다. 올 5월 말 개원 이후 여야가 합의해 처리한 민생 법안은 한 건도 없다. 더불어민주당은 파업을 조장하는 ‘노란봉투법’과 1인당 25만 원씩 지급하는 ‘돈풀기 법안’을 본회의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켰다. 대통령 거부권이 예정된 정쟁 법안들이다.

글로벌 국가들이 반도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자국 기업에 대규모 보조금과 세제 지원에 나서고 있지만 여야가 모두 법안을 발의한 K칩스법(반도체 등 투자자 세액공제 연장)은 통과까지 하세월이다.

내년 1월 시행될 금융투자소득세도 초당적으로 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정부는 금투세 폐지를 담은 2024년 세법개정안을 발표한 상태다. 금투세 법안은 주식·채권·펀드 등 금융 상품 투자로 얻은 양도 차익이 5000만 원을 넘으면 20~25%의 세금을 부과한다. 주식시장의 변동성을 줄이고 증시 밸류업을 위해서는 금투세에 대한 전향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밖에서는 ‘복합 위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데 여야는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옆을 살피지 않고 맹목적으로 자기 이익만 챙기려 든다. 달팽이 더듬이 위에서 서로 다투느라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른다. 민주당은 수적 우위를 앞세워 기세등등한 수탉처럼 볏을 세우고 활보한다. 국민의힘과 정부는 패배 의식에 사로잡힌 듯 야당을 원수 취급하며 말벗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다”며 국력을 낭비하는 사이 민생 경제는 무너지고 국민들은 거센 한숨을 토해낸다.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에서 “한 가지 나무만 있는 숲보다 여러 종류의 나무가 어우러진 숲이 더 아름답다”고 후세 사람들에게 일갈한다. 여야는 자기 당에 유리한 소익(小益)에서 벗어나 국가 경제와 국민을 위한 진정한 민익(民益)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대화 테이블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국민이 병든 국회에 내리는 처방전은 뿌리가 달라도 한 그루의 나무처럼 화합하는 ‘연리지(連理枝) 정치’다.

“내 꿈 항아리. 누가 가져갔나. 그 나쁜 사람은 누구일까.” 국민들의 허탈한 탄식이 들리지 않는가.

<서정명 서울경제 디지털 총괄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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