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권력을 잡기보다 어려운 것

2024-07-23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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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인간은 남의 밑에서 지시를 받기보다는 위에서 지시를 내리기를 좋아한다. 위에 있는 사람이 밑에 있는 사람보다 돈도 더 받고 사회적 지위도 높고 폭넓은 행동의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동서고금의 인간 사회는 물론이고 동물의 세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인간과 유전자의 98%가 같은 침팬지 사회에서는 가장 강한 수컷이 알파 메일로 군림하며 음식과 암컷에 대한 우선권을 갖는다. 사자의 세계에서도 그 무리를 이끄는 수컷은 언제나 경쟁자의 도전을 각오해야 한다. 여기서 지면 그는 쫓겨나 모든 것을 잃게 되고 새 알파 메일이 모든 것을 차지한다.

4대 문명의 출현과 함께 인류 역사가 시작된이래 가장 오래되고 보편적인 정치 제도가 왕정이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권력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평생 해먹는 것으로도 부족해 이를 대대손손 물려주는 것이 18세기 미국과 유럽의 시민 혁명 때까지 세계 대부분의 곳에서 당연시 됐다.


미국은 독립 선언서와 연방 헌법을 통해 왕정을 공식적으로 폐기한 첫번째 근대 국가다. 연방 헌법은 왕정은 폐지했지만 대통령이 종신 집권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국민들이 선택한 것이라면 그것도 가능하다는 것이 ‘건국의 아버지들’의 생각이었다.

법이 허용하고 있음에도 스스로 권좌에서 내려옴으로써 장기 집권의 길을 봉쇄한 것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었다. 미 역사상 유일하게 만장일치로 선출된 그는 원하기만 하면 죽을 때까지 그 자리에 앉을 수 있었음에도 주위의 간곡한 청을 물리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농부로 생을 마쳤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기원전 5세기 로마의 농부로 살다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동료 시민에 의해 절대 권력자로 선출된 후 나라를 구하고 다시 농부로 돌아간 킨키나투스의 예를 18세기에도 실천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의 선례에 따라 미국은 20세기 프랭클린 루즈벨트 때까지 법에 규정된 바가 없음에도 자발적으로 두번만 하고 물러나는 것이 전통으로 굳어졌다. 루즈벨트의 경우 대공황과 제2차 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사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었지만 이로 인해 장기 집권의 위험을 깨닫게 된 미국인들은 1951년 수정 헌법 22조를 통해 3선을 금지하고 전임자의 임기 절반 이상을 채운 경우 재선도 금지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한 사람이 미 대통령직에 머물 수 있는 최장 기간은 10년이다.

재선 출마는 의무 규정이 아니라 선택 사항이지만 재선에 도전하지 않은 정치인은 거의 없다고 봐도 된다. 그 명목상 이유로는 ‘시작한 것을 끝내겠다’를 주로 들고 나오지만 진짜 이유는 권력욕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현직 대통령으로 재선 출마를 처음 포기한 사람은 해리 트루먼이다. 1944년 루즈벨트가 사망하면서 대통령직을 승계해 4년간 재임하고 1948년 당선돼 다시 4년을 더 한 그는 수정 헌법 22조 규정에 의하면 출마할 수 없지만 이 조항은 통과 당시 대통령에게는 적용되지 않아 출마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령과 건강, 낮은 지지도 등을 감안해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그 다음 재선 출마를 포기한 사람은 린든 존슨이다. 1963년 케네디 암살로 대통령이 된 그는 전임자 임기의 절반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1968년 재선 출마가 가능했다. 그러나 그도 고령과 악화하는 건강, 월남전으로 국론이 쪼개지며 추락하는 지지율 등의 이유로 출마를 포기했다.

이들에 이어 세번째로 재선 도전을 포기한 대통령이 나왔다. 지난 주말 출마의 뜻을 접은 바이든이 다. 바이든도 트루먼과 존슨처럼 고령과 건강 악화, 지지율 추락이 출마 포기의 이유다. 6월말 재난에 가까운 토론과 말실수 등으로 대선 승리는 물론이고 당선돼도 직무 수행이 어려울 것이란 우려 속에서도 완주 의사를 고집했던 그도 낸시 펠로시와 척 슈머, 버락 오바마 등 민주당 원로들이 후보 사퇴를 촉구한데다 코로나까지 걸려 캠페인을 중단할 수밖에 없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회의론자들의 비판을 이겨내고 정치 입문 50년만에 대통령 자리에 오른 그로서 이렇게 정치 인생을 마감하기는 죽기보다 싫었을 것이지만 결국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 이로써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인 루저 도널드의 재집권을 막을 수 있는 극적인 계기가 마련됐다. 현재로서는 누가 바이든의 뒤를 이을 지, 그가 과연 11월 대선에서 이길 수 있을 지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바이든은 훗날 자신의 권력욕보다 당과 나라를 먼저 생각한 정치인으로 기록될 것이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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