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2024-03-12 (화)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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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인들의 꼬냑 사랑

체질상 술을 마시지 못하는 몸이 리쿼스토어에 주말 알바를 나가다 보니 흥미로운 게 하나 둘이 아니다. 술에 얽힌 미국의 역사, 몰랐던 사회상이 보인다고 할까. 그중의 하나가 인종별로 선호하는 술이 다르다는 점. 특히 꼬냑을 찾는 손님은 열에 아홉이 흑인손님들이다. 요리에 쓸 요량으로 주부들이 저렴한 브랜디를 찾는 경우를 빼면. 

꼬리꼬리한 치즈와 더불어 프랑스하면 떠오르는 꼬냑. 포도로 만드는 독한 술 브랜디 중에서도 유독 남서부 그 지방에서 나오는 것만 꼬냑이라 부를 것을 고집하는, 프랑스 특유의 자존심을 드러내는 술. 그런데 막상 불란서 사람은 별로 마시지 않는다나. 9할 넘게 수출된다고 한다. 미국이 최대 수입국이고 흑인들이 고객이다. 

가깝게는 힙합 래퍼들의 영향이 크다. 랩의 가사에 등장하며 솔솔 풍기던 꼬냑의 향기는 2001년 부스타 라임스의 히트곡 ‘Pass the Courvoisier’로 폭발을 했다. 쿠버시에이, 발음도 어려운 이 브랜드는 순식간에 매출이 30퍼센트가 늘었고 다른 래퍼들도 이 열풍에 뛰어들면서 꼬냑 전체 매출이 뛰었다. 


물론 미국에서 꼬냑을 마신 역사는 오래 되었다. 19세기 초반 꼬냑은 상류층의 술이었다. 그때만 해도 거칠기 이를 데 없던 변방의 술, 버번 위스키와는 다른 부드러운 고급술로 대접 받았다. 

이 양반의 술이 경제적으로 여유 있다 하기 어려운 흑인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이곳 미국이 아니라 본향 프랑스에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참전한 흑인병사들이 남불에 주둔하며 접하게 되었고 본토 미국에서보다 파리의 클럽들에서 재즈와 블루스로 더 진가를 인정받은 흑인 뮤지션들로부터 사랑을 얻었다. 

이들에게는 미국의 위스키보다 프랑스의 꼬냑이 입에 더 달라붙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버번 위스키는 그들을 그토록 힘들게 해 온 남부 백인세상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술이니까. 남부군을 상징하는 ‘레벨 옐(Rebel Yell)’ 이란 돌격구호를 술이름에 붙이던 시절이다. ‘레벨’로 살짝 바꿔 아직도 나온다. 전형적인 남부 백인 문화인 켄터키 더비와 나스카 경기는 버번의 명절 대목이기도 하다. 

이차대전 이후 스카치 위스키가 본격적으로 들어오면서 국내시장을 잠식 당한 프랑스의 꼬냑 업계가 미국, 그중에서도 흑인 시장을 비빌 언덕으로 삼은 배경이 깔린 것이다. 1950년대 초반 흑인 잡지에 광고를 싣고 선점한 브랜드가 헤네시다. 이어 레미 마틴, 마르텔, 쿠버시에이까지 4대 천황들이 다 가세했다. 쿠버시에이는 미국의 여성 애주가들 사이에서 꼬냑과 모스카토 와인을 섞어 마시는 유행을 알고서는 아예 둘을 조합한 신제품 골드를 내놓기도 했다. 

이쯤 되자 흑인 셀럽들은 직접 꼬냑 사업에 뛰어들기도 했다. 비욘세의 남편으로도 알려진 래퍼 제이 지(Jay Z)의 듀세가 원조들과 어깨를 겨루고 있다. 천문학적 재산을 일군 그답게 얼마 전 지분을 팔아 한 몫 크게 챙겼다. 

이렇듯 리쿼 스토어의 풍경에는 이 나라 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술은 못 해도 다양한 모양의 술병들이 들려주는 그런 이야기에 취해본다.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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