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문명의 원류인 그리스의 몰락은 3차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내전(기원전431-404)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한때는 단결하여 초강대국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을 물리쳤고,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을 함께 꽤하면서 최초의 스포츠 축제인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의 주도권을 쥐고있던 델로스 동맹의 주도세력이자 민주 진영의 맏형 아테네가 27년간의 내전에서 권위주의 진영의 맏형 스파르타가 주도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패한다.
그리고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쥐었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의 충실한 동맹이었던 테바이의 도전에 스파르타가 패하여 테바이가 그리스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긴 내전으로 그리스는 힘이 빠졌고, 북부 산악민족인 마케도니아에게 정복당했다.
그리스 내전의 시작은 아테네의 팽창으로 공포를 느낀 스파르타와의 충돌이었다. 아테네는 항복한 멜로스의 성인남자를 다죽이고, 여자와 어린이는 노예로 팔고, 500명의 새로운 이주민을 멜로스에 이주시켜 아테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아테네의 장군 투키디데스는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거기에 순응해야 한다.” 라고 하면서 멜로스 항복을 기록하였다. 이때부터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아테네를 두려워 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아테네의 기세는 대단했다. 그러나 기원 전 415년 강경파 알키비아데스가 민회에서 신중파를 ‘용기없는 핑계’로 몰아세우면서 시칠리아 원정을 선동했다. 그리고 원정을 떠났지만 알키비아데스마저 시칠리아에 도착도 하기 전에 해임되었고, 원정은 대패하였다.
극단주의자들의 강경선동에 비애국주의자로 낙인찍힐 것이 두려워 입닫고 출전했던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위해서 음모를 꾸미느라 도시는 파쟁에 말려들었고, 원정대는 효과적인 작전을 수행하지 못했다” 라고 지적했다.
기원전 406년 스파르타의 전함 120척 중 70척을 수장하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권력쟁탈을 꽤하는 정치가들은 25척의 배가 파손되었고 그에 탑승한 병사들을 구하지 못했다고 시민들을 선동하여 유능한 장군 8명을 사형시켰다.
그리고 1년 뒤, 스파르타의 전함 170척에 180척으로 맞섰으나, 160척이 수장당하는 대패를 당하였다. 아테네의 국운이 완전히 꺾여버린 것은 ‘아르기누세전투’다. 아테네는 전쟁을 내부의 정치적 반대편을 제거하기 위한 정쟁의 일환으로 하였다.
아테네의 권력자들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권력투쟁으로 국론을 분열시키면서, 아테네 자신은 물론 주도하고 있는 그리스 전체의 미래에 대한 발전적인 비전을 제시하기보다는 자기 힘을 과시하여 이웃도시국들에 대한 공포 외교로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 몰락을 자초했다. 어찌보면 2500여 년 전의 지중해 역사나 오늘날 세계의 역사 전개가 별반 다르지않다.
이어서 지중해 패권에 등장한 카르타고 역시 신생국 로마와 120년에 걸친 3차례의 포에니 전쟁에서 멸망하였다. 하밀카르바르카와 그의 아들 한니발 바르카와 같은 명장이 로마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하였지만, 분열된 카르타고의 정쟁은 전쟁의 승리를 늘 패배로 만들었다.
상업을 중시하여 해외진출을 꽤하던 바르카 가문과 농업을 중요시한 한 노가문의 대결은 카르타고의 미래를 위한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적국 로마보다 더 심각한 적이 되어 두 명장을 패장으로 만들었고, 결국 이들 명장이 없는 3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 멸망을 당하였다.
이렇듯 역사 속 제국과 왕국의 멸망은 대부분 내부의 분열이 원인이었다. 내부의 반대세력을 인정하고 경쟁하기보다는 집권자가 국가의 공권력을 동원하여 상대를 탄압하고 죽이면서 국론을 분열시켜 외부의 침입으로 멸망에 이르게 했다.
예나 지금이나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것은 집권자가 권력을 휘둘러 국민과 반대세력을 탄압하여 심각한 국론 분열을 만든 것이 원인이라는 역사의 가르침이다. 오늘날은 유권자가 선택하여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기에 이런 역사의 교훈을 거울삼아 올바른 정치지도자를 뽑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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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찬/시민참여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