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집 엄지공주

2023-12-26 (화)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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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우리집 엄지공주
두 살 반에 안겨서 미국에 온 딸. 대부분의 이민자 가정이 그랬듯이 비디오가 영어선생님이었다. 보랏빛 향기 풍기는 공룡 바니를 티브이로 보며 알러뷰 율러브미 위아해피패밀리를 따라부르기도 했지만, 화질 흐린 안테나 티비보다는 화질 나은 비디오에 더 도움을 받았다. 

어쩜 그렇게 똑같은 걸 매일 봐도 좋은 걸까. 애들 있는 집은 안다. 테이프 늘어지도록 보고 또 보면서 아이는 자기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여주인공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불러달라는 거다. 인어공주의 에어리얼이 됐다가, 미녀와 야수가 나오면 벨이 되고, 스노우 화이트가 되었다가 알라딘이 등장하니 그땐 재스민. 

집에서만 공주님 하시면 좋겠는데 프리스쿨 가서도 그렇게 불러달란다. 아내가 더듬더듬 부탁하니 못해줄게 뭐람, 선생님은 흔쾌히 받아줬다. 그런데,
한달이나 지났을까. 프리스쿨 선생님이 도리어 사정을 해왔다. 한주 두주마다 이름이 바뀌니 다른 아이들이 너무 힘들어 한다, 더는 이름 바꿔 불러주기 곤란하다...


그렇지 않아도 아이는 새로 나온 만화영화 엄지공주를 보면서 자기를 떰블리나(Thumbelina)라고 불러달라던 참이었다. 이건 아니다, 얼르고 달래고 해서 그때 부르던 피터 팬의 웬디로 굳히기로 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나중에 학교에 들어가서도 아이는 학적부의 한국이름 본명과는 별도로 웬디로 통하게 됐다. 

그렇게 웬디로 네버랜드에 가서, 행복하게 잘 살았대요 하고 동화가 끝나야 하는데 에휴, 몇 년 잘 참더니만 학년이 올라가자 작명병이 다시 도졌다. 웬디가 좀 옛날 이름이긴 하다. 그래도 그때는 공화당 대권 넘겨보던 필 그램 상원의원의 한국계 부인이자 경제학박사로 고위급에 오른 웬디 리 박사가 있어서 엄마 아빠 입장에선 괜찮은 이름 같은데 그놈의 웬디스 레스토랑이 문제였다. 툭하면 어깨 톡톡 치며 햄버거 두 개! 주문하고 달아나는 남자애들이 있단다. 

그래도 어떡하냐, 아빠도 고무줄 끊어봐서 아는데 그게 다 너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참아야지, 그런 설득과 실랑이가 오가던 즈음에 애틀랜타로 이사를 갈 사정이 생겼다. 또 한 차례 이민 가는 셈이니, 과연 옳은 결정인가 우리는 두려운 마음 가득한데 아이는 먼 낯선 곳으로 전학간다는 사실에 걱정을 하거나 친구들과 헤어진다는 것에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다. 책에서 읽은 전학 온 아이, 자기가 그런 주인공 되는 게 쿨하다는 건지. 

새 이름을 가지고 새 학교, 새 친구들을 만난다는 야무진 계획으로 아이는 행복하기만 했다. 마침내 이사를 가는 일박이일의 자동차 여행 뒷자리에서 아이는 틈만 나면 이름을 지었다가 고쳤다가 뒹굴며 킬킬거렸다. 경복궁 옆동네 김봉수 작명원보다 더 많은 이름을 지었을 터인데, 사우스 캐롤라이나를 지나 조지아주 경계로 넘어서는 순간 그중 하나로 낙착봤다. 한국이름을 살리고 너무 흔치도 않으면서 너무 어렵지도 않은 새 이름에 우리도 만족했다. 5년 뒤 시민권을 신청하면서 법원을 통해 정식으로 올린 그 이름은... 안알랴줌. 

그랬던 우리집 엄지공주가 커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져 엄지공주가 확실한 초음파 사진을 보내왔다. 반갑다, 떰블리나. 

<감씨>

주홍빛 속살을 헤엄치다
툭 혓끝에 걸린 조개 한 알
앞니로 살살 발라 톡 뱉어내면 
아이고 말끔해라, 
목욕시켜 막 내놓은 아기

누르고 굴리고 물어보고
급기야 쪼개고는 화들짝 놀라지요. 
숟가락이 숨어 있어요!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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