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역사는 반복한다

2023-12-23 (토) 이인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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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은 100년을 프랑스의 식민지로 지배받아오다가 막강한 프랑스를 퇴출하는 역사를 창출한다. 독립군 사령관 지압 장군(Vo Ngnuyen Giap) 지휘하의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가 그것이다. 1954년 월남 서북 라오스 접경지 불란서 주둔군과 단 2개월간 전투로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 월남뿐 아니라 인도차이나로부터 철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프랑스를 축출한 월남은 독립투쟁에 공을 세운 월남 공산당과 기타 신진세력과 새로운 경쟁구도가 탄생한다. 지도부는 신속하게 국제 중재를 모색한다. 디엔비엔푸 종전 2개월 후 제네바 협정으로 내부 분쟁을 종식시킨다. 북위 17도선에 비무장지대를 설치, 북은 공산 월남이, 남은 자유 월남이 점유하는 조치다.

한국의 38도선과 DMZ 유래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38선은 한국의 뜻과는 상관없이 미국과 소련이 일본 주둔군 무장해제 명목으로 38선 북쪽은 소련군이, 남쪽은 미군이 담당한다는 구실로 잠정 설치한 것이 영구화되었고, 월남은 월남이 주도해서 제네바 합의를 유도한 것이 다른 점이다.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국민성이다.


나는 1967년부터 69년까지 월남에 민간인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사이공 시내 월남인 이웃과 저녁에 자주 어울릴 기회가 있었다. 이들은 외국인을 배타한다. 자신들은 미국이 월남에 와있는 이유를 모른단다. 호치민을 존경한단다. 서울 한복판에 앉아서 김일성을 존경한다는 꼴이다. 사상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양인을 배타하는데서 하는 말이다. 월남전에서 미국이 승리할 수 없음을 그때 확인했다. 아직 현역으로 근무하던 동기생들의 의견도 나와 같았다.

디엔비엔투 전투 10년 후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이 야기된다. 월맹군이 통킹만에 정박 중인 미 해군 구축함에 사격을 가한 사건이다. 근대 월남전의 시작이다. 미군은 조금씩 추가 파병을 거듭하더니 1968년에는 54만9,000명까지 증파한다. 전비 1조680억달러, 현재 가치는 10조 달러에 해당하는 돈이다. 디엔비엔투를 이해했다면, 월남국민의 호치민에 대한 존경과 미국 배척의 국민성을 알았다면 통킹만 사건을 그렇게 확대하지 않았을 것으로 회고한다. 1975년 허겁지겁 미대사관이 헬리콥터로 탈출하는 망신은 없었을 것이다.

2001년 9.11 사태를 분석한다. 뉴욕무역회관을 폭파한 9.11 사태의 주범은 오사마 빈 라덴이다. 계획적으로 비행기 조종훈련을 받은 부하대원으로 하여금 비행기를 납치, 여객기와 함께 무역회관에 돌진, 자살 테러의 방법으로 범한 사건이다. 그날 희생된 사망자는 2,996명에 달한다. 결국 범죄의 수괴 오사마 빈 라덴은 정보당국의 10년간 추적 끝에 2021년 5월2일 파키스탄에 숨어있다가 사살됐다.

테러 당시 빈 라덴이 아프카니스탄에 있었지만 테러 후 파키스탄으로 옮긴 사실을 미국 정보당국이 몰랐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범인이 없는 곳에서 10년간 미군을 주둔시켰고 총경비는 23조130억달러에 달한다. 범인이 없는 곳을 침공한 것도 이해가 안 되지만 침공 후 범인이 그곳에 없는 걸 알았다면 즉시 되돌아 나올 일이지 10년을 허송세월 한 것은 이해할 길이 없다. 최초 목표와 관계없이 아프가니스탄을 친미국가로 전향할 목적으로 많은 예산과 지원을 제공했다. 불가능한 목표다. 월남 국민이 외국인을 배타하는 수준보다 아랍인이 서방문화를 거부하는 정도는 수십 배가 될 것이다.

미국이 철수한 후 탈레반은 즉시 샤리아 전통의 관습으로 되돌려 놨다. 여성 인권부재는 물론, 어린 소녀를 대가를 받고 이양하는 소녀신부 관습이 부활한 사회다. 수백년, 또는 천년의 풍속을 바꿔보겠다는 발상부터가 불가능하다. 10년 허송세월 끝에 내린 철수할 용단은 잘한 일이다. 한국에서 조선 때 관습을 타파하지 못하는 것도 문화의 벽 때문이다. 문화와 관습에서 오는 역사는 반복할 수밖에 없음을 경험한다.

<이인탁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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