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성자들의 행진

2023-12-12 (화)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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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34

성자들의 행진
매달 둘째 주와 넷째 주 화요일 교육섹션에 정재욱 씨의 글을 연재한다. 소소하지만 공감이 가는 일상과 삶의 현장에서 보고 느낀 생생한 경험들을 독자들과 나눈다. 이 글 시리즈의 현판 ‘워싱턴 촌뜨기’는 미국의 수도에 살고는 있으나 여전히 낯설기만 한 ‘촌뜨기 신세’라는 작가의 뜻에 따라 붙였다. <편집자 주>

오란다빵 사라다빵 앙꼬빵 찐빵 만두빵~ 목 마를 땐 목장우유 오렌지주스 코카콜라~
뭔지도 모르고 따라 불렀다. 오란다빵이 올란다-홀랜드, 그러니까 화란-네덜란드에서 왔다는 건 물론 알 턱이 없었다. 


희미한 기억에는 코미디언 이기동이 테레비에 나와서 부르는 걸 본 것도 같은데 어쩌면 착각일 수 있다.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노가바의 원형들 중에 땅딸이 아저씨가 불렀던 노래가 워낙 머릿속에 깊게 박혀서다. 짱구산에 우뚝 솟은 짱구학교는 교장이 짱구니까 교감도 짱구… 선생이 짱구니까 학생도 짱구!

남북전쟁을 비롯해서 미국사의 중요한 대목마다 등장하는 엄근진 ‘공화국 군가(Battle Hymn of the Republic)’가 짱구학교 교가로 희화화되듯이 빵 타령 역시 원곡은 영혼을 다해 간절히 부르던 흑인영가 ‘성자들의 행진(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이다. 

루이 암스트롱의 흥겨운 재즈 버전으로 귀에 익지만, 그 흥은 수년 전 쎄시봉 공연으로 다시 들을 때도 그랬는데, 원래 가사는 계시록의 그날에 우리도 하늘나라 행진하는 성자들의 대열에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담고 있다. 그런데 빵이라니! 노래 시작하는 오 한 글자 말고는 전혀 맥락 없이.

물론 빵도 간절했다. 특히 오란다 빵 사라다 빵 같은 제과점 빵은 이국적인 꿈같은 존재였으니까. 책에서만 보는 생일 케익처럼. 사과쨈이 들어간 오란다 빵은 사실 기억이 없다. 마분지 상자에 포장된 고려당, 태극당의 롤 케익, 파운드 케익, 카스텔라가 뇌물에 준하는 선물이던 70년대. 두 줄 말고 한 줄짜리면 직장인이 내 돈 내 산으로 월급날 집에 사들고 갈 수 있었을까. 옛날 얘기다. 

고등학교에 일을 잡아 발달장애 학생을 따라서 피아노 수업을 들어가고 있는데 첫 쿼터를 마치는 목표가 바로 이 곡이다. 쉬운 악보로 화음과 멜로디를 오른손, 왼손 바꿔가며 칠 수 있는 수준이다. 
물론 내 담당학생의 학습목표는 그건 아니다. 레귤러, 일반 수업시간에 다른 학생들과 함께 하는 통합교육이 목표다. 키보드와 스탠드를 혼자 찾아 세팅하고 전기코드와 헤드폰 줄을 연결해서 아무 건반이라도 두들겨 자신이 만든 소리를 즐길 수 있으면 충분하다. 

이틀에 한번 그렇게 반 학기를 지내보니 나름대로 성취가 있다. 소리에 예민해서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박자 맞추는 손뼉 치기에 귀를 틀어막고, 각자 연습 시간에 써야 하는 헤드폰을 거부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헤드폰을 귀 옆에 대줬다가, 목에 걸게 하는 등 시행착오를 거쳐 지금은 스스로 걸게 됐다. 앉는 자리를 바꿔 낮은 음 건반을 치게 한 것도 주효했다. 무엇보다 음악을 좋아하게, 친숙하게 이끄는 것이 먼저다 싶어서 교실과 화장실을 오가는 이동 중에 배우는 노래를 계속해서 들려준다. 그러다 보니 오란다 빵도 흥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학교일이 쉽지는 않다. 학생이 뭐 하나라도 배우는 것 같으면 보람이 있고 그 맛에 힘든 걸 잊는다. 내 학생의 성과도 기쁘지만 다른 학생들이 피아노를 배워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또한 흐뭇하다. 스무 명 정도의 학생 중에 히스패닉 ESL 학생들이 제법 있다. 피아노 배우기에는 한참 늦었다고 할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만져보는 건반. 그 실력이야 울며 짜며 정식 레슨 받는 꼬마들에게 한참을 뒤지겠지만 매시간 진지함과 기쁨의 표정을 옆 눈길로 느낀다. 살짝 감동이다. 

학생 본인 스스로 과목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개는 카운셀러의 권유로 정한다. 기회가 없는 학생들에게 어떻게든 기회를 찾아주려는 노력. 부족을 채워주는 평등. 교육에서 강조하는 에쿼티(Equity)라는 개념이 연수를 받을 때에는 뜬구름 잡는 듯했는데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구나 싶다.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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