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동부에서 살아보니

2023-12-06 (수) 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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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서만 40년 넘게 살다 이곳 뉴저지 브리지워터로 옮겨와 어느새 두 계절을 훌쩍 보내고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다. 이사 직전 자동차 도난사고를 당한데 이어 아내가 팔 다리를 다치는 낙상사고마저 있었고 도착해서는 소소한 행정 사무들의 처리가 늦어져 다소 피곤하고 실망감이 들기도 했었다.

그런 가운데 지난달 추수감사절을 뜻 깊게 보냈다, 지금부터 403년 전 갖은 고난 끝에 미국 동부에 상륙한 청교도들의 결단과 감사를 기억하며 감히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여정이었지만 ‘김씨네 민족 대이동’을 완수하고 먼저 와있던 아들, 딸네와 함께 동부에서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보낼 수 있었다.

요즘 곳곳에서 ‘변화와 혁신’이 화두가 되고 있다. 내게 있어서도 동부로의 이주는 인생의 후반기에 적지 않은 변화를 택한 셈이다, 돌아보면 때로는 타의에 의한 것도 없지 않았으나 그것마저도 애써 긍정적인 변화로 받아들이면서 이 나이 되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것,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살아왔다.


70년 가깝게 장수하는 조류로 알려진 독수리는 40세 쯤 되면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된다고 한다.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그동안 써먹던 부리를 스스로 바위에 문질러 부러뜨려 새 부리가 돋아나게 한 다음 새 발톱과 새 깃털도 만들어 다시 용맹스럽게 30여 년을 더 사느냐의 결단이란다.

혁신은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 내가 시도한 변화는 비록 작은 것이었지만 깨끗한 자연과 초록의 세상에 들어온 것은 무엇보다 큰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겨울이 오기 전 나는 많은 시간을 딸네 텃밭에 올라가 시간을 보냈다. 흙을 일구며 고랑을 만들고 물을 뿌리고 잡초를 뽑고 수확을 하고….

텃밭에 가득한 초록, 그 텃밭을 오르내리며 산기슭에서 만나는 초록- 녹색지수는 문명의 척도라고 했던가, 초록은 평화이고 안식이다. 지금은 그 초록이 노랗고 빨간 색깔로 바뀌거나 땅으로 내려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내년 봄에 만날 초록을 기다리며 마늘과 양파 외에 아네모네와 작약, 튤립 등도 심었다.

나는 본시 더위보다는 겨울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올 겨울이 얼마나 추울 것인지, 기후 온난화로 따뜻한 겨울이 될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캘리포니아에서 그날이 그날 같은 건조하고 지루한 날씨 속에서 살아온 터라 적당히 춥고 눈도 오고 비도 오는 변화무쌍한 날씨가 결코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가까이서 가족을 자주 만날 수 있어 좋은 반면 주변에 한인이 많지 않은 단점은 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한인 밀집지역에서 살며 게을리 했던 타 인종에 대한 친화성, 개방성을 넓혀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주류 사회 복판에서 내 민족의 아픔을 고민해볼 수 있다는 것도 새로운 도전이라 생각 든다.

남은 세월 고향을 떠나 또 다른 고향을 만들며 살아가는 동안 나는 톨스토이의 단편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해 나갈 것이다. 내 생애에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이 누구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지를….

그 사이 LA의 친구 정찬열 시인이 ‘이별은 없다’며 시 한편을 지어왔다. ‘…이별은 가슴 속에 숨어있는 것,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기억해야하는 건, 잊지 않으면 이별은 없다는 것’ 그 마음도 오래 오래 간직하고 싶다.

<김용현 한민족평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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