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들다
▶ 동진 스님 / SAC 영화사 주지
단풍의 계절도 이젠 끝무렵이다. 치워도 치워도 뜰 안 수북하던 낙엽도 조금씩 그 양이 줄어들고 있다. 모르는 이에겐 그 단풍이 그 단풍으로 보일 지도 모르지만, 영화사 가을숲은 단 한 번도 같은 적이 없다. 올핸 빨갛게 물들던 서양 배나무, 보리수까지 모두 노랗게 물들고, 늘 주홍이던 감나무잎조차 노랗게 물들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노란색 단풍나무가 숫적으로 유난히 많고, 그 빛깔이 올해는 특히 선명해서 그런게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알록달록 단풍을 보고싶은데 너도나도 노랗게 물들어 썩 달갑지만은 않다. 줏대없이 따라 물들다니, 싶다. 어쩌면 따라 물드는 건 세상 이치인지도 모른다.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주변 환경에 물드는 경향이 있다. 백프로 맞는다고는 못해도, 지역색이라던가 각 국가의 국민성 등을 말하는 것도, 사람이 한 공간에서 살면 서로 닮아 비슷한 부분이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닐까 한다. 가장 쉬운 예로는 유행이 있다. 유행은 그렇다치지만, 그 중 좀 무서운 건, 다수가 맹목적으로 사상에 물드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늘 그랬다. 좌니 우니 무슨 이즘이니 종교니 인종이니 내세우며 서로 다투고 죽여왔다. 권력은 철저하게 서로 물들이며, 모두가 비슷한 행을 하길 종용한다. 권력 앞에 왜 종종 색깔론이 등장하겠는가.
일방은 다양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고, 그래서 상대를 적대시 하게 될 수 있다. 흔히 진정한 패셔니스트는 유행을 따르지 않는다고 한다. 본인이 멋에 대한 중심이 잡혀있기 때문이다. 중심은 수용과 개성을 아우른다. 수용과 열린 마음이 되기 위해선 쉽게 물들지 않는 개개인의 바른 사상이 중요하다. 정견이 필요한 것이다. 요즘 세상은 모두가 따라해야 제대로 사는 것인양 하는 모양새다. 누가 세운지 모르는 자본의 질서에 너무 빠르게 물들어가고 있다. 누가 먹으면 똑같이 먹고, 돈을 쫓고, 남들이 하는 대로, 자신의 빛깔은 없다. 그것까진 좋은데, 나와 다르면 틀렸다,가 문제다. 부처님 께서 말씀하시길, '현명한 사람은 타인의 견해와 사상에 흔들리지 않는다,' 하셨다. 현대는 에스엔에스가 힘이 세진 시대라 대중에 맹목으로 휩쓸리지 않는 사람을 찾기 힘들어졌다. 쉽게 물들고 낙엽처럼 우루루, 이리저리 바람에 휩쓸리는 모양새라 씁쓸하다. 그런 한편, 얼마전 페이커라는 청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아니, 정확히는 중국의 한 e스포츠 전문가가 언급한, 페이커란 청년에 대한 평가 때문이라고 해야겠다. '페이커란 사람을 왜 존경해야 하냐 하면, 그가 많은 우승을 해서가 아니다. 그는 모두가 산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사람들처럼 왔다가 떠나갈 때, 모두가 짧은 순간 나타났다 사라질 때도, 문득 돌아보면, 마치 혼자 수행하는 고독한 구도자처럼 늘 그자리에 있습니다.' 라고 했다. 참고로 페이커란 청년은 얼마전 23년 '롤드컵대회'에서 우승한 프로게이머이다.
'홀로 수행하는 고독한 구도자처럼,' 이란 말이 울림을 주었다. 모두가 의심할 때도 그는10년을 그 대회에 참가하고 4번을 우승 했으며, 이 기록은 영원히 깨어지기 힘들거라 한다. 요즘 세상에 외부의 평가와 흐름에 물들지 않고 줏대있게 산다는 것은 결코 쉽지도, 흔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경쟁국의 해설자가 저보다 어린청년에게 존경이라는 말을 할만큼, 가치있는 일이기도 하다. 어차피 삶은 본인이 먹고 산 밥처럼, 자신이 혼자 소화해야할 것이다. 아무도 대신 소화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인생은 누구에게나 고독한 것이다.
그래서 더 무리를 이루고 서로 같아지려고 애쓰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한 생각 바꾸면, 고독은 나쁜 것이 아니다. 영화사의 저 푸른 상록수도 더불어 잘 살아가고 있다. 독불장군이 되자는 것이 아니다. 달라도 된다는, 그 유연성을 가지게 되면, 같고 다른데 대한 시비와, 빨리 남과 같아지려는 그 고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유다. 자유가 행복임은 모두가 안다. 왜 굳이 같아지려고, 같아지라며 구속을 선택하는 지. 물들려 애쓰지 않으면 자신의 빛깔을 지닌 채 자유롭게 살아 갈 수 있다. '무소의 뿔처럼.' 물들지 않는 늘 푸른잎은 지지 않고 오래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