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량목조 구조에 타일로 마감한 이층집은 견고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풍긴다. [노경 건축사진작가 제공]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나온 프로도의 집을 본떠 거실에 아치 디자인을 적용했다. 동굴처럼 아늑한 프로도의 집은 남편의 로망이었다. [노경 건축사진작가 제공]
집은 사각 마당을 중심으로 건물이 들어선 ‘ㄷ’자 형태다. 관리의 편의성을 위해 석재와 자갈로 마감한 중정. [노경 건축사진작가 제공]
집을 짓고 살면 매일 ‘집의 대화’가 쌓인다. 경기 화성시 반송동에 들어선 옥현우(46)·고태영(44) 부부의 집 한가운데는‘살롱’이 있어 많은 이야기가 일상과 맞물려 쌓여 간다. 푹신한 소파에 파묻혀 책을 읽고, 마당을 보며 차를 마시고, 주말마다 큰 테이블에 모여 앉아 가족 세미나를 연다. 가족이 10년 살던 주택을 떠나 박현근(재귀당 건축사사무소 소장) 건축가와 손을 맞잡고 새 집을 지은 것이 올해 초. 입주한 지 일 년이 채 안 되는데 부부와 십대 남매, 남매의 이모까지 다섯 식구가 사는‘자갈자갈(대지면적 264.10㎡, 연면적 193.44㎡)’에는 이름처럼 많은 이야기가 쌓였다. 택호인‘자갈자갈’은‘옳고 바르게’라는‘잘’이라는 뜻과 함께‘여럿이 모여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소리’라는 의미도 있다.“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지은 이름이에요. 집을 오가며 자연스레 만나게 되는 구조예요. 다양한 목적으로 어울리고 쉬기도 하는 살롱 같은 모습이 만들어지죠.”
■집, 조금은 다른 선택
부부가 일찍이 주택살이를 시작했던 건 ‘육아' 때문이었다. 맞벌이 부부가 남매를 키우면서 처음에는 부모님에게, 나중엔 아내의 여동생에게 도움을 받아야 했고, 대식구가 부대끼면서도 분리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이 일명 ‘듀플렉스 주택' 분양광고였다. 듀플렉스 주택은 한 필지에 두 가구의 집을 나란히 지은 건축물로 따로 사는 두 집이 마당을 같이 쓰는 형태다. 그렇게 시작된 주택살이 10년은 집짓기를 꿈꾸게 했다.
남편 옥씨는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한 층이 13평 정도로 비좁고 마당이 외부로 공개돼 있어 불편한 점도 상당했다"며 “탁 트인 개방감을 느낄 수 있으면서 사생활이 보장된 집에 살고 싶다는 바람이 커지던 찰나 운명처럼 땅을 만났고, 또 한번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그 설명에 따라온 말. “10년 동안 주택 시세는 그대로였지만 주변 아파트 값은 3배까지 오른 상태였죠. 우스갯소리로 ‘땅에 돈을 묻었다'고 했지만,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더라고요. 그런 경험을 한 뒤 더 많은 돈을 빌려서 집을 짓는다는 게 실은 큰 모험이었지요."
부부에게 낙점받은 박현근 소장과 그의 팀은 사려 깊게 땅과 공간을 매만졌고 마침내 가족의 로망을 실현했다. 미술관을 연상케 하는 모던하고 단정한 외관에, 안으로는 웅장한 거실과 조용한 중정을 품은 집은, 통쾌하리만치 시원하면서도 고즈넉하다.
■ ‘따로 또 같이’ 사는 집
자갈자갈의 핵심 콘셉트는 ‘따로 또 같이'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와 사춘기 청소년, 미혼의 이모가 함께 살고, 개인의 취향이 분명한 가족을 위해 건축가는 ‘같이 공간'과 ‘따로 공간'을 철저하게 구분했다.
이 집의 상징인 거실과 다이닝 공간, 앞마당, 2층의 취미실은 ‘같이' 공간이다. 박 소장은 “가족들이 집에 돌아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자연스레 어울려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물 흐르듯 배치했다"며 “독립된 가족실이자 다목적 놀이공간인 거실은 진입부에 아치문을 만들어 아늑한 분위기를 냈다"고 설명했다. 거실 벽면의 한쪽은 책장과 윈도 시트로 채우고, TV 대신 롤스크린을 설치해 시원한 화면으로 영상을 즐길 수 있다. 꽤 넓은 거실 공간에는 대형 소파 대신 가족이 모여 앉을 수 있는 큰 테이블을 놓았다. 소파와 TV가 있는 아파트 거실과는 사뭇 다른 이 거실을 가족들은 살롱이라고 부른다. “자연스럽게 모여 뒹굴거릴 수 있는 공간이 중심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매주 일요일에 모여 소소하게 가족 활동을 해 왔거든요. 가족이 가장 많은 활동을 하는 곳이자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에요."
8.5m에 달하는 층고와 중정을 향해 난 4m 높이 창문은 가정집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스케일이다. 법적으로, 구조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최대치까지 올려 한 통으로 만든 오픈 거실이다. 여기에는 가족이 살면서 남다른 ‘체적'을 원없이 누렸으면 하는 건축가의 바람이 담겼다. “천장이 낮은 아파트에서는 항상 앞만 보고 살잖아요. 사실 공간을 위아래로 경험하는 것 자체로 큰 감동이 있어요. 고개를 수시로 들어 집안 곳곳을 살필 수 있다는 건 주택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사치죠."
1층과 2층에는 유독 긴 복도가 눈에 띈다. 거실과 다이닝 공간 등 공용공간과 개인 공간의 경계에 복도를 만들고, 그 길을 통해 구성원이 각자의 독립된 공간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박 소장은 “서양에서는 방과 방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설계할 때 복도를 먼저 계획한다"며 “이 집도 그런 방식을 따랐는데, 복도 길목을 만들어 서로를 위해 언제나 열고 닫을 수 있는 구조가 됐다"고 설명했다.
■미완의 집을 채우는 일상
원래도 ‘집순이' ‘집돌이' 를 자처하던 부부는 이사 온 뒤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정원을 어떻게 단장할까, 지인들을 초대해 무엇을 나눌까 즐거운 고민을 하며 주말을 기다린다. 그렇게 정원에 새로운 식물이 뿌리를 내리고, 집안 곳곳에 추억과 이야기가 쌓여 간다. “살면서 원하는 가치가 다르잖아요. 누군가는 여행에, 누구는 물건에 돈과 시간을 투자하죠. 저희는 매일 같이 모여 있는 공간에 가치를 두는 부류예요. 집이 가장 좋아하는 취미이자 삶 자체죠."
다섯 사람이 복작거리는데도 집이 단출하고 단정해 놀랐는데, 이런저런 물건으로 함부로 채우지 않고, 서로를 배려하며 생활을 신중하게 꾸려가는 구성원들의 성향 덕분인 듯했다. 아내 고씨의 블로그(blog.naver.com/perkyto)를 보면 이 가족이 집을 살뜰하게 매만지고 소소한 재미를 채워 가는 광경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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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효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