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국부는 조지 워싱턴이다. 미 독립 운동 지도자들은 1775년 4월 19일 보스턴 인근 렉싱턴에서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첫 총성이 울린 후 조지 워싱턴을 독립군 최고 사령관으로 지명하며 그는 롱 아일랜드 전투의 참패를 견디고 밸리 포지의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며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 후 워싱턴은 연방 헌법에 따라 치러진 선거에서 첫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며 두 번 임기를 마친 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었음에도 자진해서 권좌에서 내려온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왕 조지 3세는 “그렇게 한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란 말을 남겼다.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지를 말해준다.
미국의 국부가 워싱턴이라면 중국의 국부는 모택동이다. 1921년 상해에서 탄생한 공산당 창립 멤버인 그는 결국 중국 대륙을 통일해 중화 인민 공화국을 세웠다. 그러나 1949년 그가 집권한 후 1976년 죽을 때까지 20여년은 재난의 연속이었다. 1958년 ‘대약진 운동’의 결과 최대 5,000만 명이 아사했고 그 실패를 덮고 집권을 연장해 보겠다고 1966년부터 일으킨 ‘문화 대혁명’으로 다시 수백만이 죽고 중국의 산업, 교육과 문화는 엉망이 됐다. 이런 그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몇번이나 모택동에 의해 숙청됐다 살아난 등소평은 “그의 공은 7이고 과는 3”이란 평가를 내렸다.
한국의 국부로는 누구를 꼽아야 할까. 이승만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이승만은 1899년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5년 7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 1904년 특별 사면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박사 학위를 얻은 후 장장 30여년간 해외를 떠돌며 독립 운동을 벌인다. 1948년 대한민국 첫 대통령이 되지만 4.19 혁명으로 축출된 후 하와이에서 쓸쓸히 생을 마치게 된다.
그 후 6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장기 집권과 독재 등 부정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는 해방 직후 최빈국이던 한국 경제를 지금 세계 10위권에 육박하게 한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그의 첫번째 업적은 농지 개혁이다. 그는 가장 시급한 과제로 농민이 지주에게 땅을 빌려 소작료를 내는 농지 제도 개혁이라 보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지만 지주 세력의 지지를 받는 한국민주당을 배제하고 공산주의자였던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앉혀가면서까지 이를 단행했다. 지주에게 지가 증권을 주는 대신 토지를 받고 이를 수확량의 30%를 5년간 내는 조건으로 농민들에게 나눠줬다. 이로 인해 해방 직후 35%에 불과했던 자작농은 1951년 90% 넘게 늘어났다. 농지 개혁이 6.25 직전 이뤄지는 바람에 ‘치고 내려가면 남한 농민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라던 박헌영의 예상은 빗나갔고 한국은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됐다.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이승만의 업적은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다. 1953년 미국은 하루 속히 한국전을 마무리하고 철수하고 싶어했다. 반면 이승만은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는 휴전은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맺지 않고 미국이 발을 뺀다면 북한의 재침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친미 사대주의자라는 오해와는 달리 이승만은 미국을 믿지 않았다. 1905년 ‘태프트 가쓰라 밀약’을 통해 한국을 일본에 넘기고 1949년 ‘애치슨 라인’을 통해 한국을 미 방위선 밖에 둔 일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를 둘러싼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이승만은 1953년 6월 18일 과감한 결단을 내린다. 반공포로 석방이 그것이다. 이 조치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노발대발한다. 공산군 포로를 돌려 보내고 속히 휴전 협정을 마무리지으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화는 났지만 방위 조약 없이 휴전은 없다는 이승만의 결심이 확고하다는 것을 안 미국은 이를 수락하고 같은 해 10월 1일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한다. 이와 함께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면서 한국은 북한 재침에 대한 든든한 억지력을 갖게 됐고 이 또한 한국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됐다.
오는 27일은 정전 협정 체결 70주년, 올 10월 1일은 방위 조약 체결 70주년이 된다. 이 세월 동안 이승만의 공과 과를 기록한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지난 달 이승만, 박정희,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제들이 이승만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위원회에 참여, 건립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기념관 사업이 건국 대통령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이뤄지는 계기가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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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