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워싱턴 구미위원회에 이승만 기념관 건립 추진”

2023-07-20 (목) 이종국 / 편집국장
크게 작게
“워싱턴 구미위원회에 이승만 기념관 건립 추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고(故) 이승만 박사(1875~1965) 기념관 건립 사업이 지난 6월 닻을 올렸다. 민관 합동으로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기로 하자 원로배우 신영균도 서울의 사유지 4천평을 건립 부지로 내놓겠다며 힘을 실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 여권도 적극적이다. 4.19 혁명으로 퇴장한 그가 다시 현실의 무대에 올려지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 전 대통령 연구교육단체를 운영해온 양동자 박사를 만나 이 박사에 대한 평가와 워싱턴 기념관 건립 계획을 들어보았다.

-한국에서 이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 추진위가 발족됐다. 지금 다시 그를 기념하고 재조명하는 이유는 무엇이라 보나.

그간 바람직 못한 세력들은 이승만을 폄하하고 김일성을 올려주며 대한민국은 탄생하지 않아야 될 나라였다고 주장해왔다. 전교조는 이런 잘못된 역사를 가르쳤다. 김동길 전 연세대 교수, 이인호 전 서울대 교수 같은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잘못 가르친 우리 자신을 꾸짖고 통곡해야 한다”고 개탄해 할 정도였다. 이 박사 기념관 건립은 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한 과정이라고 본다.


-분단 책임에 독재자, 그리고 건국의 아버지,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개인적으로 이 박사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나님은 모세를 세워 출애굽 시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내셨다. “하나님이 보우하사~”란 애국가 구절처럼, 하나님은 이승만이란 인물을 모세와 같이 한반도를 위해 세우셨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모세다. 모든 위인들에는 허물이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해방 이후 내전에 가까운 좌우 갈등, 전후 냉전을 통한 세계 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번영할 수 있는 역사적 기틀을 만들었다. 허정 전 국가수반은 “이 박사는 대한민국의 국부, 아시아의 지도자, 20세기의 영웅”이라고 평했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해 잘못 알려진 게 많다.

-우리가 기억하는 역사적 과오 외에 신생 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그가 성취한 구체적 업적이 있다고 보나?

그는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으로 그리고 외교를 통해서 대한 독립에 몸 바치신 분이다. 무엇보다 대한민국에 자유민주주의의 근간과 정체성을 누가 소개했나. 우리 모두가 반봉건의 몽매함 속에 빠져있을 때 이 박사는 미국에서, 워싱턴에서 민주주의를 배우고 체화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이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국’이다. 대한민국이란 국명도 이 박사가 의장으로 있던 제헌국회에서 만든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물론 반공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의무교육, 농지개혁, 해양평화선 설정, 근로기준법 제시, 남녀평등권 및 참정권 보장 등을 통해 혼돈과 질곡의 우리 민족을 자유민주주의의 반석 위에 올려놓으셨다.

-이 박사는 한미동맹의 산파역을 했지만 한편으로 미국과 일본에 굴종하지 않는 외교 전략을 폈다. 미중 대립이 새로운 세계 체제의 틀로 부상한 지금 이 박사의 외교 전략이 새삼스럽다.

그는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외교 전략가가 아니다. 미국에서 정치외교학을 공부했고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6개월 전에 이승만은 ‘Japan Inside Out’을 출간했다. 진주만 공격을 예언한 그의 통찰력과 예지력은 적중했다. 미 정가에서 그는 정치 지도자로 부상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은, 70년 동맹의 흐름 속에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면 ‘핵 폭탄급 전쟁 억지력’이다. 세계 최강 미국의 군사력을 토대로 우리는 경제성장과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비해 이승만 대통령은 선제적으로 해양 평화선을 선포해 대한민국의 주권과 해양자원을 보호하기도 했다. 그의 외교는 세계의 흐름에 대한 통찰력과 경험, 결단력 속에서 나왔다.

-2016년, 워싱턴에 이승만·박정희 대통령기념 연구교육재단을 설립했다. 그동안 어떤 활동을 해왔나?

미국의 학생들 누구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잘 알듯이 말로만의 애국과 뿌리교육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바로 알리고 전파하는 게 중요하다는 취지로 설립했다.

1차 4개년 계획을 세워 그동안 각종 세미나, 강연회, 기고, 연구 등 교육에 주안점을 두고 활동해왔다. IRS에 비영리단체 등록도 했다. 이 박사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 내외와 교유하고 연세대 이승만연구원에서 발간하는 이승만 전집 발간위 고문으로 참여하고 기부도 해왔다. 근래는 COVID로 인해 활동에 어려움이 많았다.

2차 4개년 동안에는 이 박사 기념관 건립에 주력할 방침이다. 그리고 미국에는 조지워싱턴 이름을 딴 대학교가 있지만 한국에는 이승만 이름을 딴 대학교가 없다. 궁극적으로 워싱턴에 ‘이승만 대학’을 언젠가는 세우려는 목표를 갖고 있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 박사와 워싱턴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워싱턴에 있는 이 박사의 대표적 독립운동 유적지와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워싱턴DC에는 모두 네 군데에 이 박사 거주지 및 사적지가 있다. 1919년-31년 임시정부 구미위원회가 13가 H 스트릿에, 그리고 13가 Park Rd, 17가 Hobart St, 그리고 16가에 마지막 구미위원회 사적지가 있다. 현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워싱턴은 이 박사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그는 워싱턴을 무대로 대한독립 외교를 펼쳤다. 이 소중한 사적지들을 잘 보존하고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

-워싱턴에 이승만 기념관을 설립한다는 계획은 아직도 진행형인가?

1941년-45년 이 박사가 구미위원회 및 주거지로 사용한 16가의 건물을 구입해 기념관으로 탈바꿈하려는 계획이다. 이곳에 연구소와 도서관, 영상관람실, 미팅 홀 등을 꾸미려고 한다. 2년 뒤에는 매입해 4년 뒤에는 개관했으면 한다. 그간 흑인 목사 부부와 몇 차례 만나 매각 의사를 확인하고 유대관계를 맺어왔다. 워싱턴에 이승만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국가적 차원의 의미가 있다. 외교도시 워싱턴에는 세계 각국 대사관이 상주하고 자녀들도 학교에 다닌다. 이들에게 기념관 방문을 통해 한국의 역사를 알리고 동기부여를 한다면 그들 나라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공공 외교다.

-기념관 건립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원인데 마련 방안이 있나?

매입과 보수에 300만달러가 예상된다. 종자돈으로 20만달러가 준비된다. 우리 재단 산하에 이사들을 주축으로 건립위가 구성돼 올 하반기부터 전국적으로 모금운동을 펼 계획이다. 기념관 건립은 1안도 있지만 2안, 3안도 마련돼 있다.

그리고 건립에서 중요한 것은 주최다.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다. 역량이나 인품, 그간 해온 일 등이 건립의 동력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승만 박사가 세운 비전과 업적의 수혜자이다. 모두 이 건립운동에 동참하고 헌신해주면 고맙겠다.

▲ 양동자 박사는 1940년 부산 태생으로 고향인 충북 보은에서 성장했다. 경희대에서 체육학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워싱턴 칼리지&침례 신학교에서 목회신학 석사, 하워드대에서 심리상담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7년-2007년 하워드대 교수와 79-84년 미 태권도연맹(AAU) 회장, 84-88년 미국 올림픽위원회(USOC) 상임위원을 지냈다. 또 팬 아메리카연맹 회장, 세계태권도연맹 법사위원장도 역임했으며 전 세계 체육학 교수들의 단체인 세계체육학회(ICHPER-SD) 총재를 지냈다.

<이종국 / 편집국장>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