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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은 수줍어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

2022-06-03 (금) 글 박흥진 한국일보 편집위원 / 할리웃 외신 기자 협회(HFPA)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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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진의 Hollywood Interview - ‘4계절의 여왕: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저자 조안나 럼리

“여왕은 수줍어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

‘4계절의 여왕: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저자 조안나 럼리

올해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70주년이 되는 해. 이를 기념해 출판된 책‘4계절의 여왕: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70주년 축하’(A Queen for All Seasons:A Celebration of Queen Elizabeth II on her Platinum Jubilee)의 저자로 배우인 조안나 럼리(75)를 영상 인터뷰했다. 모델 출신으로 영화와 TV 및 연극배우이자 저자요 인권 옹호가 이기도 한 럼리는 드라마와 연예 그리고 자선사업 등에 미친 공로를 인정받아 여왕으로부터‘데임’(Dame)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럼리는 제2대 제임스 본드 조지 래젠비의 유일한 007 시리즈‘007 여왕폐하 대작전’(1969)에 단역인 본드 걸로 스크린에 데뷔, 그 후 수많은 영화와 TV 작품에 나오면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럼리는 1970년대 후반에 방영된 첩보 액션 시리즈 ‘뉴 어벤저스’의 여 첩보원 퍼디로 잘 알려져 있다. 럼리는 런던의 자택에서 인터뷰에 응했다.

“여왕은 수줍어하거나 곤경에 처한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

첩보물 TV 시리즈 ‘뉴 어벤저스’의 스파이 퍼디로 나온 조안나 럼리(왼쪽)



-어떻게 해서 책을 쓰게 됐는가.


“작년에 출판사에서 올 해 여왕즉위 70주년을 맞아 책을 써 달라는 청탁이 왔다. 난 늘 여왕을 존경해왔기에 이 청탁을 기꺼이 받아 들였다. 출판사에서 내게 보내온 자료들인 일기와 편지와 연설 및 정치적 관점 들을 들여다보면서 여왕의 얘기를 흔히들 쓰는 연대기 식으로 쓰기보다 주제별로 쓰기로 결정했다. 산더미 같이 많은 자료를 참고하면서 거기에 나만이 아는 사항들을 추가해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출판사의 자료와 내가 아는 것들을 조화시키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와 함께 여왕의 사진사를 비롯해 여왕을 아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얘기를 들었다. 출판사가 원하는 마감시일과 책의 양에 맞추느라 애를 먹었다. 책을 쓴다는 것은 연기와는 아주 다른 멋진 일이었다.”

-책을 쓰면서 여왕에 관해 알게 된 놀라운 점이라도 있는지.

“여왕을 아는 사람들의 얘기에 의하면 여왕은 제 6감이 매우 발달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 특히 수줍어하거나 곤경에 처했거나 말을 더듬는 사람들의 입장을 민감하게 깨닫고 있다는 것이다. 그 예로 다음과 같은 얘기가 날 크게 감동시켰다. 여왕이 버킹엄 궁에서 마련한 점심에 피와 죽음으로 얼룩진 전장에서 일한 의사를 초대한 뒤‘안녕하세요. 어디서 부상자들을 돌보고 그 상황이 어땠는가요’라고 물었다. 이에 의사는 그 참혹한 기억 속으로 되돌아가지 못해 목이 막히고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이를 본 여왕이 의사의 마음을 간파하고 즉시 말을 바꿔 옆에 있는 비스킷을 집어 들더니‘우리 개들에게 이거나 먹일까요’라고 말 한 뒤 둘이 함께 여왕의 애견들에게 비스킷을 먹였다. 그러면서 여왕은 의사에게 개들에 관한 얘기를 들려주면서 그를 진정시켰다는 것이다. 여왕의 이런 모습은 우리가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으로 우리는 여왕이 우리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여왕을 겉으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가 여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어떤 사람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엘리자베스 2세의 삼촌인 에드워드 8세가 이혼녀인 월래스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에서 물러나지 않았더라면 엘리자베스 2세는 지금처럼 국가와 교회의 수장이 되어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과 뉴스매체의 초점이 되지 않고 그냥 공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쏟아지는 끊임없는 관심의 초점은 지나치게 과다한 것이다. 엘리자베스 2세가 10살 났을 즈음 아버지 조지 6 세가 왕이 됐는데 조지 6세에게는 엘리자베스 2세와 여동생 등 딸 밖에 없고 엘리자베스 2세가 장녀여서 엘리자베스 2세는 어렸을 때 자기가 언젠가는 여왕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 엘리자베스 2세는 유머감각이 뛰어났는데 책을 많이 읽으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그가 여왕이 되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깊이 사랑하는 자연 환경 속에서 말을 비롯한 동물들과 함께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또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어 지금은 자연과는 정반대인 왕실 생활을 하고 있다. 늘 잘 차려 입고 총명하게 보여야하고 회의에 참석하고 연설을 듣고 해야 하는 공적인 일상을 살고 있다. 그러나 여왕도 실은 보통 여자일 뿐이다. 내가 그를 경탄하는 것은 이런 보통 여자가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충실한 결단을 통해 비상한 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왕과 같은 삶은 악몽이어서 난 이 짓 못 하겠어 라고 생각하겠지만 일단 여왕이 되면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

-여왕과 영국왕실의 얘기를 극화한 인기 TV드라마 시리즈 ‘크라운’을 봤는지.

“여왕의 어린 시절을 그린 시리즈 초기의 에피소드는 봤지만 내가 잘 알고 있는 찰스 왕자와 지금 그의 아내가 된 카밀라 파커 보울즈 그리고 앤 공주 등이 나오면서 보기를 포기했다. 시리즈에 나오는 이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실제와 다르기 때문이다.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나는 내가 좋아하고 알고 또 친근한 사이가 된 사람들에게 충실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리즈가 표현하는 허위는 가히 끔찍한 것이다. 배우들도 다 훌륭하고 만들기도 잘 만들었지만 진짜가 아니어서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과거 당신의 전성기가 그리운지.

“요즘은 사회전산망이 성해 우리들의 삶을 영원히 바꿔 놓았다. 그리고 사람들도 보다 냉소적이요 비판적으로 됐다. 옛날에는 TV 채널이 몇 개 안 돼 전국의 사람들이 모두 같은 프로를 보다시피 했다. 그리고 이튿날이 되면 사람들은 모두가 본 같은 프로에 대해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요즘에는 있을 수가 없다. 요즘은 누구든지 프로를 아무 때나 자기 마음대로 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같은 시간에 같은 프로를 보고 이튿날 그 것에 대해 함께 얘기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여왕을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이 어땠는가.

“내가 여왕을 처음 만난 것은 배우들도 참가한 단체 모임에서였다. 여왕이 나타나자 우리는 절을 했고 이어 여왕이 뭐라고 말을 했는데 나는 그저 여왕을 만났다는 사실에 넋을 잃고 멍하게 있었다. 완전히 혼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동전과 우표와 사진으로 봐 잘 아는 사람을 실제로 입체적으로 보면서 그의 크기와 생동감과 아름다움을 가까이서 깨닫자니 정신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말문이 막혀 한다는 말이 터무니없는 소리 몇 마디였다. 내가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받은 것은 버킹엄 궁에서였는데 여왕이 내 목에 메달을 걸어주면서 ‘앞으로도 영화 계속해 만드세요’라고 친절한 말을 했다. 그 말에 나는 여왕이 내가 누구인줄을 알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다음 만난 것은 작위를 받은 지 15년 후다. 버킹엄 궁의 여왕의 개인용 방에서 있은 점심에 초대를 받았다. 여왕이 애견들과 함께 방에 들어왔는데 아주 친절하고 생기발랄했다. 그리고 술을 들면서 사람들과 얘기를 했다. 이어 여왕이 나를 보고 ‘점심하러 갈까요’라고 말을 했는데 참으로 매력적이요 사랑스러웠다. 그 때 느낌은 초현실적인 것이었다. 그 다음에 만난 것은 선박 진수식에 참가했을 때였는데 여왕이 날 보더니 ‘당신 여기서 뭘 하는 거에요’리고 말을 했다. 매일같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여왕으로부터 그 말을 들으면서 난 여왕이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대단한 영광이었는데 여왕은 총명하고 푸른 눈으로 사람들을 다정하게 바라보면서도 아울러 영혼 안까지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여왕을 만날 때마다 난 뭐라고 말을 하긴 했는데 하나같이 터무니없는 말을 중얼거린 셈이다. 그리고 여왕과 대화를 할 때면 여왕에 앞서 먼저 말을 시작해선 안 된다.”

-사람들이 왜 여왕에 대해 매력을 느낀다고 생각하는지.

“여왕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 삶의 매일을 최선을 다해 살겠다고 다짐한 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이렇게 다짐한 것을 이제 나이 95세가 되도록 충실히 지키며 살아왔다. 수많은 시련과 남편을 비롯한 가까운 사람들을 잃는 개인적 슬픔과 불편에도 불구하고 자기 의무로부터 벗어나는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다. 경탄을 금치 못할 사람으로 군주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마저 여왕에 대해서만은 찬사를 보내고 있다. 사람들은 여왕의 굳건한 힘과 강인함을 존경하고 있으며 여왕은 우리 모두의 정신을 고무시켜 주는 사람이다. 우리는 여왕과 같은 사람을 가지게 된 것을 영광이요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왕이 그렇게 오랜 생애를 군주로서 군림하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매력이라고 본다. 여왕이야 말로 매우 훌륭한 여인이다.”

-여왕의 힘은 어디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는가.

“그의 기독교 믿음이다. 여왕은 평생 신심이 강한 기독교인으로 살아왔다. 매 일요일 교회에 가서 기도한다. 그는 기독교의 겸손과 근면의 가르침을 믿으며 또 충실하고 진실하게 산다는 것을 믿는다. 여왕은 이런 믿음을 지켜왔으며 이런 신심이 그를 굳건히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와 함께 여왕의 왕관을 쓰면서 지키기로 한 의무가 그의 힘이 되고 있다. 신앙과 의무감이 여왕의 힘의 원천이다.”

-당신의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지.

“우스운 말인지 모르겠지만 채식주의자가 되면서이다. 40여 년 전 부터 육류와 생선을 안 먹었는데 그 후로 난 에너지가 충만하다. 이와 함께 처칠이 했듯이 한 20분 동안 선잠을 자는 것이다. 난 영화 찍을 때도 점심을 먹는 대신 20, 25분간 선잠을 자는데 그러고 나면 에너지가 회복된다. 그리고 기분이 좋으면 에너지도 생긴다.”

<글 박흥진 한국일보 편집위원 / 할리웃 외신 기자 협회(HFPA)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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