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자신의 본능에 의해 남자들과 자신도 파멸하는 드라마

2022-02-18 (금)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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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도라의 상자’(Pandora’s Box·1929) ★★★★★(5개 만점)

자신의 본능에 의해 남자들과 자신도 파멸하는 드라마

룰루는 자신의 자극적인 선정성에 빨려든 여러 남자들을 파멸로 인도하나 결국 자신도 추락한다.

오스트리아 감독 G.W. 팝스트의 대담하고 정열적이며 거부하지 못할 성적 매력을 지닌 쇼걸의 흡인력에 빨려들어 파멸하는 남자들과 결국 자신의 본능에 의해 스스로도 파멸하고 마는 여인에 관한 비극적 멜로드라마로 무성영화다.

쇼걸 룰루로 나오는 캔자스 태생의 댄서였던 루이즈 브룩스를 대뜸 세계적 스타로 만들어준 영화로 룰루야 말로 뭇 남자를 유혹해 멸망시키는 ‘팜므 파탈’의 전형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룰루는 내면으로는 어린 소녀처럼 순진해 그 성적 매력이 더 한층 자극적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온갖 세상 풍파에 시달리는 룰루에게 동정이 가고 또 그를 연민하게 된다.

짙은 물감의 감촉을 지닌 선정적이며 과감한 스타일의 시대를 앞서 간 영화다. 여고생 스타일의 짧고 끝이 칼날 같은 단발 머리를 한 브룩스의 도도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연기가 압도적인데 클로스 업으로 보여주는 브룩스의 고혹적인 얼굴과 유인하는 눈에 이끌려 그를 사랑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베를린의 쇼걸 룰루를 탐내는 남자는 한 두 명이 아니다. 룰루는 신문사 사장인 거부 루드빅 쇤의 정부인데 룰루를 갈망하는 또 다른 남자는 쇤의 아들로 작곡가인 알바. 그런데 쇤은 자기 아들이 룰루를 연모하는 것을 알고 아들에게 “저런 여자는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룰루에게 마음을 빼앗긴 또 다른 남자는 쇼 흥행사인 로드리고 크바스트. 이 밖에도 룰루는 영화 내내 여러 남자들과 관계를 맺다가 끝내 창녀로 전락하고 만다.

룰루는 자기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는 쇤을 유혹해 파혼시키고 자기 남편으로 만든다. 그러나 룰루가 결혼식 날 다른 남자와 희롱하는 것을 본 쇤이 분노에 못 이겨 권총을 빼어들고 룰루와 다툼을 벌이다가 쇤이 총에 맞아 죽는다. 룰루는 재판 끝에 5년 형이 선고되나 알바의 도움으로 둘이 함께 탈출한다. 이어 둘은 해외로 도주하기 위해 배에 오른다. 그리고 또 살인이 자행된다.

그로부터 몇 달 후 둘은 런던에 도착, 후진 아파트에 거처를 정한다. 여기서 창녀가 된 룰루가 크리스마스 전 날 맞은 첫 고객이 실제로 있었던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 ‘잭 더 리퍼.’

치정 살인극이자 자유로워지려는 여자와 이를 우리 안에 가두어두려는 남자들간의 갈등에 관한 사회적 의미도 지닌 작품으로 룰루는 사회적 규범을 벗어나려다 계속해 처벌을 받는 희생자이기도 하다. 루이즈의 연기와 촬영이 눈부신 걸작이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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