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전, 강연을 마친 후 참석자들로부터 서면질문을 받았다. 대부분 정치와 사회에 관한 질문이었지만 색다른 내용이 하나 섞여있었다. “평생 죽지 못해 살아온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줄 것이냐”는 다소 엉뚱한 물음이었다.
필자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질문자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에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이후 그 질문은 필자의 머리에 둥지를 틀었다.
지금도 그 분에게 명쾌한 대답을 줄 수야 없지만 곰곰이 생각한 끝에 이렇게 반응하기로 했다. 먼저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데서 출발하자. “질문을 주신 분에 대해 제가 아는 유일한 사실은 당신께서 평생 형용하기 힘든 숱한 고초를 겪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버티고 계시니 대단한 인내력의 소유자이시네요. 제게 조언을 구하시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계시는 것 같은데,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제가 아는 다른 한 가지 사실은 이것이 당신 혼자만이 겪는 고통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세상은 늘 고통 받는 자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절망의 만조를 경험했습니다. 슬픔, 부끄러움, 퇴출, 실연, 물리적 혹은 정신적 건강문제 등 사람들이 겪는 고통의 원인은 제각각입니다. 그러나 고통의 공통분모는 타인과의 단절에서 비롯되는 소외감입니다.
물론 제게도 힘겨운 고통의 계절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감정적 고통이 가슴과 복부에 날카로운 물리적 통증을 일으킨다는 충격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고통스런 감정은 타인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자기소외의 유혹을 가져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타인과의 접촉이 필요한 시기인데도 말입니다. 견디기 힘든 극단적 고통이 닥칠 때마다 저는 저보다 훨씬 큰 어려움에 처했던 분들을 떠올립니다. 그들 중 한명이 나치독일 시절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빅토르 프랑키입니다.
프랑키는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자체를 컨트롤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거기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조절이 가능하다. 끈기와 용기, 이타심과 품격을 유지한 채 어려운 상황에 대응하면 인생에 깊은 의미가 더해진다. 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는 매일 조그마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
나치 수용소에는 고통스럽게 살기보다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프랑키는 그들을 향해 “아직도 당신의 인생은 당신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프랑키는 그들에게 니체의 말을 쉽게 풀어 들려 주었습니다. “살아야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삶의 무게를 견뎌낼 방법을 찾아낸다”고 말이죠.
성서는 요나, 엘리야, 모세 등 삶의 무게에 압도당해 죽음을 원했던 인물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들이 느꼈던 처절한 막막함과 황량함이 인생경험의 불가결한 부분이기에 성서의 한 복판에 그들을 세워놓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렇듯 고통은 성서 속 인물들에게 심오하면서도 불가측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통은 사람들을 이기적이고, 사랑과 유머를 모르는 성난 자들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사람을 망가뜨리는 게 아니라 닫힌 마음을 깨뜨려 열어젖힌 고통의 숱한 사례를 압니다. 이런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어루만집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 지혜에 이른다는 옛말은 결코 틀린 게 아닙니다. 우리는 종종 행복한 시기보다 어려운 시절을 거치며 많은 것을 배웁니다.
그렇다고 고난을 겪은 사람이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은 무력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황량함을 맛본 사람들은 타인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랍비인 엘리엇 쿠크라는 뇌수술을 받은 후 툭하면 쓰러지는 여성에 관한 일화를 전해주었습니다. 그 여성이 쓰러질 때마다 사람들은 다투어 달려가 그녀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쿠크라에게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사람들이 서둘러 저를 일으키는 것은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기가 거북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제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미처 준비가 안 된 저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는 게 아니라 그저 제 곁에 함께 누워주는 것입니다.”
저는 어떤 목사님에게 고통에 처한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는지 물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라는 그 목사님의 대답을 제게 질문을 하신 분에게 그대로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이 세상이 내가 원하는 것을 해주리라는 환상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정한 선의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너나없이 허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이고, 인생은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시인이기도 합니다. 삶은 변합니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서 낙심의 늪은 기쁨의 땅에 길을 내어주었습니다.
데이빗 브룩스는 2003년부터 뉴욕타임스의 컬럼니스트로서 정치, 문화, 사회과학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현재 PBS ‘뉴스아워’와 NBC의 ‘언론과의 만남’(Meet the Press)의 해설자이며,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소셜 애니멀’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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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빗 브룩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