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거룩한 분노와 열정… 나라위해 목숨바친 의기(義妓)

2021-06-03 (목)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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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

▶ (44) 논개(論介)

거룩한 분노와 열정… 나라위해 목숨바친 의기(義妓)

윤여환 화백이 제작한 논개 영정은 2008년 2월4일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됐다. 논개 영정의 얼굴은 신안주씨(新安朱氏) 용모 유전인자를 논개의 생장지인 장수지역을 중심으로 추출해 내는 방식으로 형질인류학적으로 분석 제작됐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거룩한 분노와 열정… 나라위해 목숨바친 의기(義妓)

[Photo ⓒ 2021 Hyungwon Kang]

거룩한 분노와 열정… 나라위해 목숨바친 의기(義妓)

의기(義妓) 주논개가 꽃다운 19세 나이에 경상남도 진주성 촉석루에서 왜군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남강(南江)에 굴러 떨어졌다는 장소는 오늘날 기준으로도 매우 험악한 바위절벽이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거룩한 분노와 열정… 나라위해 목숨바친 의기(義妓)

의기(義妓) 주논개가 꽃다운 19세 나이에 경상남도 진주성 촉석루에서 왜군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남강(南江)에 굴러 떨어져 죽었다는 장소에 있는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성 촉석루 아래 남강변에 있는 바위. 경상남도의 기념물 제235호 진주 의암(晋州 義巖) 에 정대륭(鄭大隆 1599-1661)이 1627년 ‘의암’(義巖)이라는 전자체 글씨를 새겼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거룩한 분노와 열정… 나라위해 목숨바친 의기(義妓)

[Photo ⓒ 2021 Hyungwon Kang]

거룩한 분노와 열정… 나라위해 목숨바친 의기(義妓)

진주성 촉석루 앞 남강(南江)변에 의기(義妓) 주논개가 꽃다운 19세 나이에 왜군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떨어져 죽었다는 장소에 위치한 의암사적비 비각에 의기논개지문 편액이 걸려 있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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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7월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이며 또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있었던 진주내성 북문 포문. 제2차 진주성 전투는 호남과 영남이라는 지역적 경계를 넘어 민족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 지역과 계층,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관군과 백성들이 함께 싸운 대표적인 전투였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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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장수군 장수읍 논개사당에는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에서 일본군 장수 게야무라 로꾸스케를 껴안고 의롭게 죽은 주논개의 영정을 모셔놓은 의암사가 있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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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사당 의암사에 논개를 표현한 시인 변영로(卞榮魯, 1898-1961)의 시를 새겨놓은 시비가 있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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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논개 동상이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의암 주논개 생가를 복원해놓은 공원에 우뚝 서있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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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2021 Hyungwon 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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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군 장계면에 있는 주논개의 묘는 의병장 최경회 묘 앞에 모셔 놨다. [Photo ⓒ 2021 Hyungwon Kang]

거룩한 분노와 열정… 나라위해 목숨바친 의기(義妓)


1592년 5월부터 1598년 12월까지 7년간 이어진 동북아의 균형 관계를 뒤흔드는 대사건이자 국제 전쟁이었던 임진왜란 때 조선의 인명 피해를 최소 45만 명에서 75만 명 사이로 현재 한국 사학계는 보고 있다.

우리 영토를 초토화시켰던 참혹한 전쟁 중에 그리 많지 않은 통쾌한 일 중에는 1593년 7월27일(음력 6월29일) 꽃다운 19세 나이에, 왜군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진주성 촉석루(矗石樓)에서 끌어안아 함께 남강(南江)에 떨어져 죽은 의기(義妓) 주논개(朱論介 1574-1593)를 꼽을 수 있다.


전북 장수군에 있는 논개 사당에 의하면, 1574년 신안 주씨(朱氏) 집안에 태어난 논개의 생애에 대한 최초의 문헌적인 기록은 1621년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이고, 생가는 1872년에 간행된 호남읍지(湖南邑誌)에 오늘날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마을로 기록되어 있다.

장수 현감(縣監)으로 내려와 있을 때 논개를 처음 만난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는 임진왜란 때 전라우도 의병장으로 돌아와서 의병을 모집하는 과정에서 다시 논개를 만나 후처로 맞아들였다.

1592년 11월에 있었던 제1차 진주성 전투(第一次晋州城戰鬪)를 승리로 이끌면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한 최경회는 1593년 7월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이며 또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면서 순국하였고, 논개는 왜군의 전승 축하연에서 남편의 죽음을 복수하였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라고 논개를 표현한 시인 변영로(卞榮魯, 1898-1961)의 시에서 보이듯이, 논개는 수세기 동안 외세침략과 계층간 차별 등 안팎으로 모진 수난을 겪어 왔던 우리 민중의 마음속에 영원히 기억되는 인물이다.

나라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바친 의기열사(義妓烈士) 주논개가 죽였다는 왜군 적장 케야무라 로쿠스케라는 낭인(浪人, ronin)은 일본 추모 문헌에 “힘이 장사였고 조선과의 전쟁에서 선두에 서서 공을 많이 세웠다”고 기록되었는데, 그는 임진왜란 때 악명 높은 일본 센코쿠 시대의 무장이며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다이묘, 大名)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 수하의 장수였다.

1592년 음력 4월부터 시작된 임진왜란 당시의 일본은 1467년부터 100년 이상의 전국시대 내전을 통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훈련이 잘 되어 있던 정예군으로 최강의 육군 17만여 명을 동원, 칼로 두부를 자르듯 한반도를 가르며 명(明)나라를 향해 진군했다.

예상치 못한 대규모 침략에 놀란 조선의 제14대 국왕 선조(재위 1567-1608)는 서둘러 수도 한성을 버리고 개성,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도망갔다. 요동(遼東)으로 도피하고자 했던 선조가 의주에 머무르게 된 것은 함께 의주까지 동행했던 대신들이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 보잘것없는 남자)가 되는 것입니다”라며 하나같이 선조의 요동 망명을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한다.


1592년(선조 25) 4월 한양을 떠났던 선조는 이듬해 1593년10월3일에야 한양에 돌아온다. 그동안 침략군 왜군들과, 조선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조선 땅에 들어온 명나라 군사들의 횡포로 아녀자들이 겪은 수모를 포함해, 백성들의 말 못할 숱한 피해는 여러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다.명나라 군대는 선조의 간곡한 도움 요청에 꿈쩍도 안하다가 경상도 영천성에서 의병들이 보내온 왜병 519명의 목이 명나라 요동에 보내진 후에야 한반도로 들어왔는데, 1593년 2월 조-명 연합군의 4번째 평양성 싸움에서야 겨우 성을 되찾은 것을 보더라도, 명나라 군대의 싸움 능력은 조선 민간인들이 자체 조직한 의병들과 승병들에 비해서 형편없었다.

그들이 처음 8년 간 조선에 주둔하며 최고 5만 명의 명나라 군인들이 먹는 것부터 약탈에 가까운 현지 조달 방식은, 오늘날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에 비해서도 엄청난 부담이었다.

조선을 침공한지 보름이 조금 지난 1592년 5월3일에는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서울 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을 통해서 군주가 없는 한양에 진입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남대문을 교통편의상 헐려고 했으나 가토 기요마사가 임진왜란 때 입성했다는 인연 때문에 1934년 조선총독부가 오히려 남대문을 보물 1호로 지정했다고도 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승병을 무장시킬 무기가 발견된 불국사를 불태운 것으로도 악명이 높지만, 임진왜란 2년째인 1593년 7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휘하에 있던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죽게 한 논개 사건으로 역사에 남는다.

조선 땅에서 왜군들이 뼈아프게 깨진 전투 중에는 1592년 11월에 있었던 제1차 진주성 전투(第一次晋州城戰鬪)가 있다. 우리 관군과 의병 약 3,800명이 왜군 3만여 명과 싸웠는데, 진주성을 공격한 지 이레 만에 침략군들은 성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외성과 내성의 이중구조로 된 진주성 앞에는 남강이 흐르고 후방 삼면에는 넓고 깊은 해자가 있던 진주성은 천혜의 요새였다.

제1차 진주성 전투 승리는 1592년 8월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조선 수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과, 1593년 3월 경기도 고양현 행주산성에서 조선군의 결정적 승리였던 권율(權慄, 1537-1598)의 행주대첩(幸州大捷)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평가된다.

이듬해 1593년 7월 임진왜란 최대 규모의 전투이며 또한 가장 많은 사상자가 나온 제2차 진주성 전투는 일본군이 침략 첫 해에 가장 큰 패배를 당했던 진주에서, 임진왜란 그 시점에 명나라와 일본군과 휴전협상 중 우위에 설 수 있는 기회로 보고 일본은 9만 명이 넘는 병력으로 모든 것을 걸었다.

진주성 혈전으로 불린 1593년 7월 제2차 진주성 전투 시작 7일 만에 조선 측 관군과 의병 6,000~7,000명과 9만여 명의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조선 군사와 성안에 있던 모든 백성을 포함한 6만여 명이 전멸했다.

제2차 진주성 전투는 호남과 영남이라는 지역적 경계를 넘어 민족과 영토를 지키기 위해 지역과 계층,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관군과 백성들이 함께 싸운 대표적인 전투였다. 왜군은 성을 허물고 해자를 메우며, 우물을 덮고 나무를 베어 1차 전투에서 패한 분풀이를 했다. 진주성을 빼앗은 일본군 역시 많은 희생적 비용의 대가를 치르는 승리(pyrrhic victory)였기에, 일본군도 피해가 커서 전라도로 진격하지 못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若無湖南 是無國家(만약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을 것이다)라고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의기 주씨(義妓朱氏) 논개가 순국한 지 32년 뒤 1625년에 논개가 떨어져 죽은 바위에는 진주의 백성들 뜻에 따라 정대융이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겼고, 1739년(영조 16년)에 논개를 추모하는 의기사가 세워지고, 의기로 추모 받게 되었다.

논개의 얼이 서린 진주에서는 매년 5월 넷째주 금, 토, 일 3일간에 걸쳐서 호국충절의 성지 진주성에서 제관 등 모든 의식을 여자(기생)들이 주관하는 진주논개제가 있고, 매년 음력 6월에 길일을 택해서 제향을 올리도록 한 행사 의암별제도 있다. 전라북도 장수군에서는 매년 음력 9월3일 주논개의 탄생을 기념하는 제례봉행을 통해 논개의 충절과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있다

16세기 전 세계에서 으뜸가는 군대를 지녔던 일본은 두 차례의 한반도 정복 계획 실패 이후 많은 혼란에 빠졌고, 조선에 군대를 보냈던 명나라도 멸망했던 시기에, 의기열사인 논개를 비롯한 수많은 익명의 의병과 승병들이 피흘린 희생이 있었기에 조선이라는 나라가 수백년간 명맥을 유지해왔으며, 동아시아에서는 물론 세계적인 문화강국으로 21세기에 우리가 빛을 발하고 있다.

*퓰리처상 수상자 강형원 기자의 우리·문화·역사 Visual History & Culture of Korea 전체 프로젝트 모음은 다음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www.kang.org/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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