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꿰렌시아’

2020-11-16 (월)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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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우사들과 밀고 당기는 생사 게임을 하다가 소가 지쳐 좌절했을 때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전략이 있다. 꿰렌시아(Querencia)로 피하는 것이다.

투우장에 들어 온 소는 꿰렌시아가 어디에 있는지 직관으로 안다. 지진이나 쓰나미가 밀려오기 전에 그 진동을 미리 감지하고 산으로 피하는 동물의 귀소본능과 같다.

아무리 투우사에게 치열하게 쫓기던 소라도 일단 꿰렌시아의 영역 안에 들어가면 지고(至高)의 평안과 안전을 느낀다. 그곳에서 헐떡이던 숨을 고르고 불안감과 위기의식에서 벗어나 자신감을 회복한다.


소에게 꿰렌시아는 어머니 자궁속의 태아와 같다. 그곳에서 소는 신비한 생명의 접촉을 체험하고 돌연 거듭난다. 새롭게 도약한다.“
(헤밍웨이의 단편 ‘오후의 죽음’ 중에서)

꿰렌시아는 소가 단순히 숨을 고르는 휴식 장소가 아니다. 위기 때마다 올랐던 시내 산이 모세에게 거룩한 성소(聖所)이었듯이 소에게도 그 곳은 일종의 성소다. 투우사가 꿰렌시아 안으로 무례하게 진입하면 소는 모욕감을 느끼고 사납게 반격한다.

투우 경기의 결과는 소가 필요할 때 마다 꿰렌시아에 가서 충분히 쉬고 회복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1973년 10월 6일은 이스라엘의 욤키풀(Yom Kippur War) 대속죄일로 금식절기가 시작하는 날이었다. 당시 이집트와 시리아는 서로 의기투합하여 소련제 탱크와 미사일을 앞세워 이스라엘을 급습했다.

아랍 동맹군의 선제 군사력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전쟁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전쟁은 다수의 예상을 뒤엎고 보름 만에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났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의 승리의 비결은 대속죄일 기간 동안 성전에 조용히 머물며 기도한 ‘침묵의 힘’ 때문이라고 밝혀졌다.

욤키풀 금식 기간이 끝난 직후 전장에 나온 레세프(Reshef) 탱크부대 사령관은 위기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참모회의를 가졌다. 이 참모회의를 통해 적군 미사일 부대의 치명적 약점을 찾아냈다.

레세프 장군은 적군의 약점의 자리를 정확히 공격했고 전쟁에 승리했다. 아이작 뉴턴은 말했다. “나는 오랜 연구 끝에 가진 침묵의 시간에 창의적 통찰력을 발휘하곤 했다.”

<김창만/목사·AG 뉴욕신학대학(원)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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