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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 법난 40주년, 그 개운찮은 뒷맛

2020-10-29 (목)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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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7 법난 40주년, 그 개운찮은 뒷맛
"...이미 많은 스님들이 도착해 있었다. 옷을 늦게 갈아입는 스님에게 그들은 발길질과 쇠몽둥이질을 서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퍽퍽 내려치는 소리와 고통의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어떤 스님은 벌써 얼굴에 피멍이 들었고 어떤 스님은 고통스럽게 가슴을 부여잡고 울부짖었다... 그들은 나를 의자에 거꾸로 세워 콧구멍에 수건을 씌우고 고춧가루를 퍼 넣고 거기다 양동이의 물을 들어부었다... 계속 잠을 재우지 않고 눈에 서치라이트를 비추면서 고문을 가하면 정신이 몽롱해져 사뭇 헛소리를 했다. 혼몽 중에 나는 최면에 걸린 듯 까마득하게 잊었던 어린 시절의 어느 날로 돌아가 있기도 하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생생하게 앞에 다가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나무위기(namu.wiki) 10.27 법난 피해자의 증언 중 일부>

1980년 10월27일 새벽, 한국 각지의 사찰 및 암자 5,731곳에 무장군경 3만2천여명이 들이닥쳤다. “불교계가 사이비 승려와 폭력배들이 난동·발호하는 비리 지대로서 자력으로는 갱생의 힘이 없는 것으로 판단”한 당시 신군부(계엄사령부)의 조치에 따른 것이었다. 승려 등 약 2,000명이 검거돼 폭행과 고문에 시달렸다. 상당수는 투옥됐고 감옥보다 더했다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갔다.

그날로부터 40년이 지났다. 대한불교조계종은 27일 오전 조계종 총본산인 서울 조계사에서 ‘10.27 법난 희생자 천도재’를, 오후에는 인근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추념식을 봉행했다. 이와 함께 법난 피해 현황과 종단 대응,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의 자료를 선보이는 법난 40주년 특별 전시회가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21∼29일)과 봉은사(26∼28일)에서 열렸다.


법난 직전에 미국으로 피신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여래사를 개원했던 설조 스님(현재 속리산 법주사 체류)도 매년 이맘 때 개원기념법회가 열릴 때면, 법난 전후를 회상하며 전두환 신군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하곤 했다. (주지 공석과 코로나 시국 등 여러 사정상 올해 여래사의 개원 40주년 기념법회는 없는 듯 지나갔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인가. 엄연히 10.27 법난의 피해자인데도 그 피해에 대한 동정과 공분이 시나브로 희미해지고 혹시 법난의 수혜자 아닌가 의심이 들게 하는 이들과 단체들도 없지 않다. 멀리 갈 것도 없다. 40년 전 그날을 법난으로 규정하고 신군부 규탄과 피해보상운동에 앞장서온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이 대표적이다. 지난한 투쟁 끝에 2008년 3월 국회에서 제정된 ‘10.27법난 피해자의 명예회복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정부보조금 1,500억이 포함되는 법난기념관<사진-조감도> 건립이 엉터리로 진행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법난 당시 총무원장으로 있다 쫓겨난 월주 스님의 오늘도 민망하기는 마찬가지다. 전두환 지지성명을 거부하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지지해 모진 고문을 받았다는 주장 등에 힘이 실리면서 그는 1994년 두 번째로 총무원장이 됐고 차후 지구촌공생회 등 자선단체를 만들어 활발히 활동했다. 특히 일제하 종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나눔의집을 운영해 주목받았다. 그러나 최근 나눔의집 후원금 수십억원이 이상한 용도로 쓰이고 입주 할머니들을 학대했다는 등 내부폭로가 제기됐다. 현 총무원장 원행 스님도 나눔의집에서 감투를 쓰고 일정한 활동비를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법난 당시 제주 관음사 주지로 있던 지선 스님은 보안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이후 민주화운동에 적극 가담하면서 불교계의 대표적 민주투사로 꼽혔으나 재작년 여름 종단민주화(종단적폐청산) 운동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모양새를 취했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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