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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천왕문 금강문 불이문 ‘바로알기’

2020-10-22 (목)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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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천왕문 금강문 불이문 ‘바로알기’

해인사 일주문 <출처:오마이뉴스>

한국의 제법 이름있는 전통사찰 본당에서 불공을 드리려면 특별한 의미를 지닌 특별한 이름의 문을 서너 곳 통과해야 한다. 사찰 삼문(三門) 또는 사문(四門)이다. 북가주 등 해외한인 사찰들은 대개 부지 자체가 넓지 않거나 넓다 해도 재정사정 등 때문에 삼문이든 사문이든 세워둔 곳이 별로 없다. 있다가 없어져도 잊히기 십상인데 애초부터 없었으니 삼문이나 사문에 대해 제대로 아는 해외한인 불자들이 드물 수밖에 없다.

▶일주문(一柱門) : 절의 정문이다. 두 기둥 위에 지붕이 얹혀진, 보기에 따라 다소 아슬아슬한 형식이다. 용어의 유래는 의외로 싱겁다. 두 기둥이 나란한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엄밀히 따지면 이는 말 안되는 말이다. 두 기둥은, 지붕을 얹든 새끼로 연결하든, 항상 나란할 수밖에 없다. 나란한지 여부는 세 기둥 이상일 때만 따질 수 있다. 어쨌든 용어의 상징은 결코 싱겁지 않다. 부처님 도량에 들어가기에 앞서 세속의 번뇌를 내려놓고 부처님 가르침에 일심으로 정진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다지(라)는 문이다.

절의 정문인 만큼 일주문에는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에는 대개 그 절이 자리잡은 산 이름과 그 절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 가야산 해인사, 오대산 월정사 같은 식이다. 산 이름을 넣는 것은, 찾기 쉽게 하는 배려도 있지만 선종이 대개 산문을 중심으로 형성됐기에 생긴 일종의 정체성의 표시라는 해석도 있다. 일주문의 기둥에는 흔히 주련(柱聯, 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새겨넣거나 써붙인 글씨)이 있다.


▷금강문(金剛門) : 일주문과 천왕문 사이에 있으며 불법의 수호신 금강역사를 모시는 문이다. 절의 정문에서 본당에 이르는 이른바 삼문(三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가장 강력한 금속 금강과 같이 초강력 지혜로 일체의 번뇌를 극복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인왕문(仁王門)이라고도 한다. 금강역사는 대개 주먹을 쥐거나 금강저, 금강칼, 금강칼 같은 것을 든 모습이다.

▶천왕문(天王門) :

금강문을 지나서 만나는 세 번째 문이자 이른바 사찰삼문으로만 따지면 일주문을 지나서 만나는 두 번째 문이다. 여기에는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는 사천왕상이 있다. 동쪽은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은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은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은 다문천왕(多聞天王)인데 절에 악귀가 스며들지 못하게 해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들의 사념을 씻어내는 역할을 한다. 고대인도 토속신앙에서 유래돼 불교에 편입됐다는 사천왕은 수미산에 사는 신들로 세상의 모든 선악을 알아내어 제석천에 보고하는 역할을 맡는다고 전해진다.

증장천왕은 오른손에 용, 왼손에 여의주를 쥔 형상으로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푼다고 한다. 광목천왕은 오른손에 삼지창, 왼손에 보탑을 쥔 형상으로 굉음과 웅변으로 갖가지 나쁜 것을 물리친다고 한다. 다문천왕은 웃는 모습이다. 오른손에 칼을 쥔 지국천왕은 선한 이에게 상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 벌을 주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불이문(不二門)

절의 본당에 들어가는 마지막 문이다. 본당 입구에 세워진다. ‘불이’는 진리는 본래 둘이 아니다(일체에 두루 평등한 진리), 즉 진리 그 자체를 뜻한다. 부처와 중생이 본래 다르지 않고 삶과 죽음이 본래 다르지 않으며 만남과 이별이 본래 다르지 않고 물음과 답변이 본래 다르지 않으며 등등등 천상천하 모든 것은 근원적으로 다 밀접하게 연결된, 상호의존적인 하나라는 것이다. 따라서 불이는 일체의 분별을 떠나고 언어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절대경지를 상징한다. 불이문은 이 문을 통과해야만, 즉 불이의 경지에 도달해야만 부처의 경지에 이른다는 의미를 지닌 문이다. 그래서 불이문은 해탈문으로도 불린다(불이문과 해탈문을 따로 둔 절도 간혹 있다). 해탈은 탐욕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심(心)해탈,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는 혜(慧)해탈로 구분된다는데 불이의 관점에서 보면 이 또한 하나다. 6년 고행 끝에 위없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40여년 세상을 주유하며 진리를 설하고도 열반에 들기 전 “나는 40여 년간 단 한마디도 설하지 않았다”고 한 말씀 또한 ‘설함과 설하지 않음의 불이’를 마지막으로 몸소 ‘설한 또는 설하지 않은’ 사례가 아닐까. <정태수 기자>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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