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충걸의 필동멘션 - 비닐봉지와 플라스틱에 대한 우려
방위 복무 시절, 동료들과 난지도에 간 것은 군 생활의 네 번째 충격과 같았다. 거대한 기계 장치를 향해 움직이는 UFO 모선을 본 기분. 광활한 지대를 뒤엎은 쓰레기 산은 폐기물이 덮인 영화적 디스토피아에 딱 맞는 대역이었다. 추석 사흘 전, 엄마와 재래 시장에 갔다. 가게마다 장 본 것을 새카만 비닐 봉지에 싸주었다. 작은 봉지가 늘어나면 큰 봉지 안에 전부 담았다. 생선 가게에서는 반투명 비닐봉지에 갈치를 넣고 신문지에 둘둘 만 다음, 까만 비닐 봉지로 다시 봉했다. 한마디로 검은 비닐 봉지는 명실상부 현대 모든 판매 행위의 구두점이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한 뒤에는 커피의 아리아가 뒤따를 것이다. 커피를 내리기 전, 식탁부터 정리했다. 신문, 신문에 딸려온 마트 전단지, 사과 식초, 영양제, 잉크가 마른 펜, 구청에서 발행한 잡지, 작은 택배 박스, 엄마용 전화번호부, 두 개의 안경 케이스를 치우고 방금 장 본 것들을 푸는 순간, 우리 집은 곧바로 비닐 봉지의 본산이 되었다.
접어서 서랍에 넣거나, 구겨서 싱크대 아래 처박거나, 더 작은 비닐 봉지들로 큰 비닐 봉지를 채울 때, 냉장고 안은 소시지와 잘린 버터, 소분한 고기와 무른 복숭아, 부스러진 초콜릿과 썰린 호박이 든 비닐이며 플라스틱 용기들이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과자는 주둥이가 반쯤 열린 채로, 스콘 한 조각은 밀폐된 비닐 안에 보관돼 있어서 왜 다이제스티브 비스킷은 딱딱하고 초코파이는 부드러운지 비밀을 알 것 같았다. 한 마디로, 지구인들이 1년에 1조 개 이상 비닐 봉지를 쓴다는 노골적인 수치에 우리 집도 적극적으로 가세하고 있었다.
영원히 썩지 않는 도리안 그레이의 쓰레기 지대. 내야 할 날이 다가오는 세금의 느낌. 시민 정책 질문과 자치적 문제 해결. 선동적 진보주의의 교차로. 전에는 숨었다가 생태적 다락방으로 끌려 나온 흉측한 신. 공중으로 날아가 공원 울타리와 배수로를 막는 공기 역학적 장애물. 기계 안에서 엉켜선 수리비로 기절시키는 불순물. 우리들 플라스틱 인생의 진정한 대가.
정말 놀라운 것은 얇은 비닐 봉지의 불가해한 내구성이다. 콘크리트보다 센 인장 강도, 강고한 내열성, 물에 비친 햇빛처럼 바스락거리는 투명함을 볼 때마다 그 확장성과 유지력에 새삼 탄복한다. 용도도 거의 르네상스적이다. 수백 만 년 동안 마대 자루, 가죽 파우치, 바짝 마른 황소 음낭에 별 수 없이 물건을 넣고 다니던 사람들이 이젠 비닐 봉지로 그 모두를 대신한다. 비 올 때 방수 스카프로 쓰고, 잽싸게 개똥을 치우고, 휴지통에도 씌운다. 심지어 노래도 지어 바치고, 영감의 원천으로 추앙한다.
케이티 페리라는 젊은 미국 가수도 이렇게 노래했다.
바람에 날리는 비닐 봉지처럼 느낀 적 있어?/종이처럼 얇은 너는 카드로 만든 집/비명을 질러도 아무도 안 듣는 땅 속 깊이 묻힌 기분/너에게도 기회가 있어/네가 글러버렸다고 자책하지 마/누구도 널 대신할 수 없으니까
7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아메리칸 뷰티’로 각본상을 받은 앨런 볼은 비닐 봉지를 향해 공식적으로 고마워했다. “마지막으로 몇 년 전 세계무역센터 앞에서 우리에게 영감을 주었던 비닐 봉지에게 그게 뭐였든 감사를 표합니다.” 그 영화에는 전체 문화를 통틀어 가장 유명해진 비닐 봉지가 나온다. 불만 투성이 인물이 바람에 춤추는 비닐 봉지 영상을 보며 “이 세상엔 너무나 아름다운 것들이 존재해”라고 읊는 그 장면.
이제 비닐 봉지를 둘러싼 작은 충돌은 더 큰 전쟁이 되었다. 현대 편의의 운명이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마지막 자취, 다른 이에게는 지구의 미래에 대한 논쟁점으로서. 가끔 바다에 떠다니는 비닐 봉지를 (해파리로 오인해서) 먹는 거북이의 슬픈 사진을 본다. 한반도 크기로 지구의 반을 도는 플라스틱 소용돌이, 페트 병과 칫솔과 비닐의 섬을 보면 바다는 (물고기의 식량이 된) 플라스틱 조각으로 끓인 수프로만 보인다.
무엇보다 비닐과 플라스틱에 대한 우려는 공포와 죄의식으로 나뉜다. 이때 재활용은 죄책감 지우개로 작용한다. 재활용은 흔한 주제지만 그 자체의 공공연한 영향력과 무해한 분해의 중요성 우위가 워낙 유효한 바람에. 누군가는 빨리 분해되기만 한다면 콘돔이라도 비닐 봉지 대용으로 쓸 것이다.
생태계를 고려한 어떤 제스처도 혼란스러운 반발과 맞닥뜨린다. 비닐 봉지가 주는 거부감에는 확실히 아직도 그걸 쓰는 사람이라는 사회적 낙인이 찍혀 있다. 그러나 지금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 된 흡연 금지도 담배 연기 자욱한 술집의 구린 낭만을 진작에 추방시켰다.
물음표 몇 개가 구부린 철사 옷걸이처럼 마음을 자꾸 긁는다. 아니, 생활폐기물용 비닐 봉지는 도대체 왜 이렇게 비쌀까? 값을 따지는 사람이 안 보이는 건 묻기 힘든 질문이거나 존재하지 않는 문제라서일까? ‘이 선 위는 봉투를 묶는 부분입니다’라는 카피 인쇄는 혹시 브랜드 라벨일까? 설마 비닐 봉지 사업으로 돈을 긁는 검은 손이 있는 걸까? 아니면 비싼 비닐 봉지를 쓰기 싫으면 쓰레기를 줄이든가, 라는 으름장? 지방 자치의 쓰레기 분리 지시를 착실히 따르는 내가 용기까지 씻어가며 분류한 쓰레기들은 정말 의도대로 처리될까?
편의점에서든 카페에서든 빈 생수병이며 플라스틱 커피잔을 재활용이라고 적힌 쓰레기 통 안에 넣을 때마다 새로운 접근법이 생긴다. 한 사람이라도 먹다 남은 걸 엉뚱한 칸에 부으면 모두가 애쓴 마음이 쓰레기가 되니까. 글쎄, 이것들이 완전히 분해되어 다른 용도로 쓰일까? 회수 공장에서 또 다른 생수병으로 태어날까? 생수병의 PET(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플라스틱)와 우유병의 HDPE(고밀도 폴리에틸렌 플라스틱), 그리고 나머지 플라스틱을 따로 분리하는 기계가 있긴 있겠지?
비닐 봉지의 또 하나 강렬한 특성은 야만적이되 그 자체를 수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쓰레기라는 것이다. 석유와 천연 가스 부산물이 원료라 나무가 들지 않는다고 강조하는 환경주의자들의 갈채도 받았고. 비닐 옹호론자들은 비닐 봉지 공포가 과도하게 부풀려졌으며 종이보다 오히려 생태 친화적이라고 외친다. 종이 봉지는 더 무겁고 제조 비용과 운송 자원도 좀 드는 데다 매립지에서조차 꽤 많은 자리를 차지한다고.
비닐 봉지는 몇 시간만 쓰이곤 바로 버려져 영원히 쓰레기 매립지에 머물며 역사의 한 지점에 도달한다. 이윽고 정보와 반론, 비용과 인식이 안개 마냥 포위한 전장에서 낡은 군대 깃발처럼 펄럭이는 비닐 봉지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매립지와 불후의 시간 사이 어딘가에서 산발한 채 춤을 추는 블레이드 러너를.
이 행성을 생각하는 방식에 전환점이 된 비닐 봉지는 그렇게 기계가 가난한 채플린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모던 타임스’의 뒤집기 버전이 되었다. 아이러니야 말로 가장 강렬한 인간의 조건이라는 걸 톡톡히 보여주면서. (이때 또 하나의 해프닝이 터졌다. 비닐 봉지 대신으로 선물 받은 에코백이 온 집안을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