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슬방울이 한숨 짓거든

2020-10-07 (수) 이태상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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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서 ‘필름스 오브 봉준호(The Films of Bong Joon-Ho)가 출간되었고 이남 미국 채프먼대 영화과 부교수의 한국영화 강의가 대인기로 학생들이 대기표를 뽑는다고 한다. 생각 좀 해보면 우주 만물이 서로에게 붙어사는 ‘기생충 (寄生蟲)’인 동시에 ‘익충(益蟲)’이라고 할 수 있지 않나.

지난 9월14일 발매된 가수 김사월의 세 번째 솔로 앨범 ‘헤븐’의 “영화처럼 강렬한 이미지는 쉬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감정들과 결합해 역설적으로 깊숙히 들어간 내면의 풍경을 만들어낸다”고 한국일보 연예스포츠지 고경석 기자는 평하고 있다.

17일 온라인 화면으로 기자가 만난 김사월은 ‘헤븐’을 “체념 같은 위로”라며 “세상 모두가 행복한데 나만 힘든 것 같은 생각에 새벽에 잠 못 이루고 우울해 하다가도 아침에 해가 뜨면 일하러 가야 하는 상황이 있잖아요.


‘헤븐’은 그런 마음을 담은 곡입니다. 행복 속에서도 불행이 있고, 우울감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야 하죠. 진짜 행복이란 건 없지만, 진짜 불행도 없다고 이야기하는 ‘무심한’ 위로랄까요. 다 잘 될 거야. 행복한 일만 있을 거야 하는 위로 말고요.”라고 했단다.

여기서 우리 ‘헤븐(Heaven)’이 무엇인지 또 ‘헬(Hell)’은 무엇인지 우리 함께 생각 좀 해보리라. 낮과 밤이 그렇듯이 말이어라.

흔히 이곳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말한다.‘미국은 재미없는 천국’이라면 ‘한국은 재미있는 지옥’이라고. 이게 어디 한인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일까. 인종과 국적,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온 세상이 어른들에게는 ‘지옥’ 같아도 아이들에게는 재미있고 신나는 ‘천국’이 되지 않던가.

덧없는 인생이라지만 아무리 힘들고 슬프고 절망할 일이 많다 해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게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그 얼마나 더할 수 없이 축복 받은 일이며 실연 당한다 해도 사랑해본다는 게 못해보는 것보다 그 얼마나 더 한없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일이랴.

지지난 해 여름 두 외손자와 외손녀랑 나는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캘리포니아주(州) L.A.에 사는 여섯 살짜리 시어도(Theodore) 가 물었다. “할아버지, 왜 내가 어디에서 왔냐고 안 물어?” 나는 대답했다.“네가 돌아간 다음에도 너는 언제나 내 가슴 속에 있으니까 네가 내 옆에 있으나 없으나 다 괜찮아. 네가 어디 있든 할아버지는 늘 언제나 널 사랑하니까.” 그러자 미국 뉴저지주(州) 테너플라이라는 동네에 사는 열 살짜리 일라이자(Elijah)가 말했다.

“그렇지, 할아버지,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직도 할아버지의 ‘코스모스’가 보고 싶어?” 나는 또 대답했다. “물론이지. 할아버지한테는 모든 게 다 ‘코스모스바다’란다.”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나는 중얼거렸다.“할아버지는 이제 할아버지의 만시(輓詩)를 미리 지어놓아야 하겠다.”

그러자 세 살짜리 외손녀 줄리아(Julia)가 예쁘게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게 뭔데, 할아버지?” 그래서 나는 다시 중얼거렸다. “그게 실은 죽은 사람을 생각해 짓는 시가 아니고 살아 생전 삶을 기리는 ‘생의 찬가’란다.” 아이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고 잠잠했다. 나는 속으로 애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큐러스는 한 마디로 요약한 삶의 지침으로 ‘carpe diem’이라고 했단다. 영어사전을 보면 이 문구는 에피규러스의 철학이 함축된 것으로 ‘seize the day’라는 문자 그대로 ‘놓쳐버리지 말고’ 오늘 하루 지금 당장 붙잡아 순간순간을 만끽하면서 모든 희망을 미래에 걸지 말고 현재를 마음껏 즐기라는 뜻을 담고 있어.” 이어서 나는 하고 싶은 말을 계속 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을 머금고.

“우리에겐 무의미한 신(神)의 영원보다 보람찬 인간의 한 순간이 그 얼마나 더 복된 것이랴. 모든 어린이들이야말로 이를 몸소 실습하고 체험하며 본능적으로 누리는 행복의 화신들이지. ”

어느 새 아이들은 잠이 들어 있었다. 두 외손자는 내 양 옆에 기대어 그리고 외손녀는 내 무릎에 안겨. 밤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파도소리에 가슴 가득히 피어나는 코스모스가 내 눈 앞에 수많은 별들처럼 하늘하늘 하늘춤을 추고 있었다.

<이태상 /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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