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임 주지는 미정, 당분간 진월 스님이 대행
2018년 여름 한국, 한낮이면 섭씨 40도에 육박하는 찜통더위가 계속됐고 밤에는 25도를 넘나드는 열대야가 이어졌다. 콘크리트 건물과 아스팔트 도로가 꽉 찬 서울은 더했다. 그 즈음 대한불교조계종 총본산 서울 조계사 인근 우정공원, 샌프란시스코 여래사 창건주 설조 스님이 팔십 노구를 이끌고 비닐천막에 나앉았다. 종단개혁을 요구하는 무기한 단식정진(농성)이었다. 힘은 있으나 뜻이 없는 권승들은 귀를 닫았다. 입을 열면 냉소와 비난이었다.
중앙종회의원 광전 스님은 달랐다. 총무원 국장직을 여럿 맡고 종회의원으로 있던 그는 개혁물결에 동참하는 스님들의 조직(법륜승가회) 대변인을 맡아 설조 스님의 투쟁을 엄호했다. 설조 스님과 광전 스님의 첫 만남은 그때 이뤄졌다.
그해 가을, 40여일간의 단식을 끝내고 또 40여일간의 몸조리를 끝낸 설조 스님은 다시 SF여래사에 와 있었다. 뜻밖에 광전 스님이 여래사를 찾았다. 불교관련 학술행사 참가차 시카고로 가는 길에 들른 것이었다.
“전화번호나 주고 가소.”
이튿날 시카고로 떠나는 광전 스님에게 설조 스님은 툭 던졌다. 계획이 있었다. 서울 안국동에 법당을 마련하는 등 지속적 개혁운동을 위해 몸바치기로 한 설조 스님은 여래사를 맡을 후임자 물색에 난항을 겪고 있었다. 한국으로 간 설조 스님은 시카고 학술회의를 마치고 귀국한 광전 스님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여래사를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당초 통도사에서 겨울안거를 할 요량으로 방부까지 들여놨던 광전 스님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이번 한철 안거가 끝날 때까지... 새로운 적임자를 찾으실 때까지...”
그해 11월, 광전 스님의 통도사행 대신 여래사행은 이렇게 이뤄졌다. 지난해 1월, 여래사 이사회는 새 주지 광전 스님을 정식 CEO(비영리 종교기관의 대표자)로 만장일치 추대하고 관계기관에 등록했다. 5,60대는 젊은 축에 들 정도로 연장자들이 많은 여래사에서 젊은 광전 스님은 신도들을 부모처럼 모시며 활기와 온기를 불어넣었다. 레익타호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선원을 처분하는 한편 ‘소음에 시달리지 않고 편히 쉴 마당이 있는 여래사’ ‘보시금 말고도 안정된 수입원이 있는 여래사’ 등 몇 가지 장기적 청사진을 그려보곤 했다. 기획력과 실행력을 고루 갖춘 광전 스님이라면 너끈히 가능한 꿈이었다.
하지만 그 꿈이 이뤄지려면 좀 더 세월을 겪어야 할 형편이 됐다. 광전 스님이 건강상 불가피하게 주지소임을 내려놓고 한국으로 간 까닭이다. 스님은 8월30일 마지막 법회 겸 백중기도 회향을 하고 31일 낮 한국으로 떠났다. 백중기도 회향에는 40여명이 참가했다. 신도들은 회향법회 뒤 비빔밥을 나누며 스님과 석별의 정을 나눴다.
광전 스님의 한국행은 불쑥 나온 것이 아니었다. 실은 올해 초에 불가피한 사정을 설명하며 사의를 표했다. 일단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 직후로 정했다가 다시 미뤄 8월말 백중기도 회향까지 연장한 것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간 스님은 청화 스님 문하의 도반인 대석 스님 수행처(강원도 횡성)에서 일단 심신을 다독인다는 계획이다. 그 뒤로는? “특별한 것은 없고 다만 인연 따라...”
기자는 몇 달 전부터 이임인터뷰를 부탁했다. 돌아온 대답은 언제나 “조용히 떠날 수 있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인터뷰 이전에 한국행 뉴스 자체를 떠난 지금껏 미뤄야 했다. 30일 통화에서도 스님은 “우리 신도님들을 비롯해 여러분들이 도와주셔서 잘 있다 간다”면서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에 아무쪼록 모든 분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인연이 되면 한국에서든 제가 여기 다시 찾든 또 만날 날이 있을 것”이란 말도 잊지 않았다.
여래사 후임 주지는 8월31일 현재 미정이다. 산불 때문에 여래사에 머물고 있는 진월 스님이 당분간 여래사를 지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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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태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