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 한 해 지나면서 무언가에 도전하기 보다는 현실에 안주하고.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실수를 줄이기 위해 애쓰는 스스로를 바라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그 것은 내가 보수적인 종교집단에 속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마도 나이 들어간다는 증거일 것이다.
알아야 할 것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세상이다.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부모 자식 간이라 할지라도, 서로가 어떤 분야에 대해 어느 만큼 공부해서 어느 만큼 알고, 또 그 앎을 얼마나 지혜로 승화시켰는지, 또 그 지혜가 각자의 삶을 잘 지탱하고 있는지는 부자간에도 서로가 서로를 잘 모른다.
많은 부분에서 심지어 남보다도 자식을 더 모른다고 할 수도 있다.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된 자식에 대해서 부모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자식이 부모에 대해 아는 것도 마찬가지다. 과거 대가족 시대와는 달리, 같은 지붕 밑에 살아도 현대의 부모와 자식 사이는 거의 동거인일 뿐이다. 자식이 장성하여 분가해서 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삼라만상의 이치나 차이 또는 삶의 지혜 등에 대해 서로의 생각과 깊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깊은 대화를 일상적으로 나누는 가정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자식 간에 서로가 서로의 직접경험, 간접경험인 지식, 지혜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렵다. 거의 모른다고 하는 편이 솔직하다.
부모가 장성한 자식에 대해서 확실하고도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자식이 밖에서 뭘 하고 다니고 누구와 만나서 무슨 행동을 하면서 무엇을 배우는지를 거의 모른다."는 사실 하나이다.
누군가가 무언가에 대해 알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모른다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은 후에야 시작된다. 내 자식이고 삶의 길이가 나보다 짧으므로 나보다 경험과 지혜가 적다는 생각은. '세월의 길이는 곧 지식. 경험의 크기', '경험은 곧 지혜' 라고 생각하는 '범주의 오류'와 '이분법적 사고'일 뿐이다.
오래 살았다고 반드시 다방면의 경험이 많은 것이 아니다. 설사 다방면의 경험이 많더라도 그것이 모두 지혜화 되는 것도 아니다.
스무 살 청년에게서도 팔십 노인보다 더 번뜩이는 지혜를 발견하기도 하고, 팔십의 노인에게서도 어린아이의 치기를 보게 되기도 한다. 반대로, 이십의 청년에게서도 생각의 노회함을 읽게 되기도 하고, 팔십의 노령에게서도 청춘의 열정을 발견하기도 한다.
시대전반이 무지했던 옛날과 달리, 오늘날은 하루가 다르게 인지가 발달하고 새로이 알아야 할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무리 시대를 따라잡는 공부를 한다 해도, 나의 경험과 지식이 곧 지혜가 아니며, 아들들의 그것이 나의 그것보다 적다고 단정할 수 없는 세상이다.
낳았으므로 부모임에는 틀림없지만 정신적으로도 이끌 수 있는 좋은 부모가 되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이민 1세대로 갖은 어려움을 극복해 가며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애쓰며 살아온 부모님과 이 곳에서 태어났거나 어려서 이민 와 얼굴은 한국인이지만 사고방식이나 문화는 미국인인 자녀들의 경우는 더더욱 서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사람마다 모두 각자의 길이 있다. 부모자식간이라 하여 예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외국 공항의 터미널에서 읽은 글귀가 머리속에 남아 있다.
Have it your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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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전 스님 (SF여래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