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숲의 향기

2020-08-12 (수) 나혜경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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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기억은 참으로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는 것 같다. 결혼 이후의 삶은 나이로는 삼십 대의 한창 때이기는 하나 어린 것들 건사하랴, 맨바닥에서부터 살림 일구랴, 막 시작해서 채 자리 잡지 못한 이민생활의 쓴맛 단맛에 적응해가는 시절이어서 앞뒤를 살피는 여유로움 없이 보냈다.

여름의 초입, 푸른 숲속의 아카시아 향기는 무디어진 나의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듯하다. 아카시아꽃은 내가 다닌 중학교 뒷산의 우거진 숲속의 향이다. 창문은 숲과 연하여 열려 있어서 바람이라도 우수수 불면 진한 꽃향기가 에누리 없이 교실에 가득 차곤 했었다.

숲속 아카시아 나무 아래로 수시로 들락거리며 놀다가 퍼질러 앉아서 가위바위보 게임으로 이파리 떼어 내기에 열을 내던 어린 날의 소녀친구들이 그립다.
옆 동네 공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면적이 크고 등산로가 험하지 않아 걷기에 부담이 없었다.


한여름 대낮에도 숲속에 들어가면 덥지 않다던데 눅눅한 습기 전혀 없이 맑고 화창한 가을 같은 여름날 오후라니! 마스크를 쓰고 2미터 간격을 유지한 채 걷다가 앞에서 사람들이 오면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비켜선다. 하지만 간간히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들이 다가오면 비켜서서 등을 돌리고 안면인사조차 사양하게 되는 상황이 어쩔 수 없는 팬데믹 현실임을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러던 중 강아지 목줄을 풀어놓은 채 산책하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목줄을 하지 않은 강아지를 보면 소형견이라 할지라도 더럭 겁이 나는데 두 명의 나이 지긋한 백인 남자들은 몸집이 작지 않은 강아지들을 숲속에 풀어 놓고 뛰어다니게 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 사람이 두 마리씩 도합 네 마리의 중형견들이 목줄 없이 자유롭게 다니게 하고 있었으니 광활한 숲속에서 혹시라도 개 물림 사고라도 발생하면 어쩌려고 저러나 싶어 황당했다.

그리고 며칠 뒤 강아지 목줄 관련 사실에 대해서 흥분한 나를 대신해 공원 웹사이트에 문의한 딸아이가 답장이 왔다고 읽어주었다. 강아지를 목줄 없이 놀게 할 수 있는 시설과 장소가 있는데도 이용하지 않은 그들의 이기적이고 개념 없는 행위에 대해 직접 항의하지 않은 것은 옳았고 이후에 이런 일이 있을 때는 공원관리인에게 즉시 알려서 조치하겠으니 곧바로 신고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답답해서 어쩌다 한번 나가보는 자연의 품속인데 서로가 조금씩 배려하고 이해하면서 행동한다면 남의 눈살 찌푸리게 하지 않을 텐데 못내 아쉬웠다.

<나혜경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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