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약 없는 아메리칸 드림

2020-08-05 (수)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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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한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될 때 '마스크 배급제'가 시행돼 매일 마스크를 공급받기 위해 전국의 모든 약국에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선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를 보면서 배급제를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배급제는 주로 사회주의 국가에서 국가가 공급량이 제한되어 있는 상품이나 식량의 분배와 소비를 조절하기 위해 일정한 기준에 따라 상품 및 식량을 판배 혹은 공급하는 제도이다.

배급제는 주로 나라 경제가 어려울 때 많이 쓰는 제도로, 과거 냉전시대의 중국이나 구소련처럼 못먹고 못사는 나라들의 상징이기도 했다. 한때 자원부국으로 떵떵거리며 살던 사회주의 국가 베네수엘라에서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수년째 겪자 정부가 지금 전력 공급 등을 '배급제'로 운영하고 있다.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는 쿠바도 주요 먹거리와 생필품에 대한 배급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해온 것이 이미 오래된 일이다.
지금 미국에서도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이 음식을 제공받기 위해 학교 앞에 길게 줄을 서 있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 본산인 미국과 영국의 경우 세계 제2차대전 같은 전시상황에서는 배급제가 시행되기도 했다.


전시체제 아래 미국 정부는 설탕, 커피, 치즈, 우유 같은 생필품을 배급했었다. 코로나 사태도 다름없이 전시를 방불케 한다. 아니, 이미 독재국가 중국과 무역전쟁을 하고 있으니 총칼만 없을 뿐, 실제 전시상태에 돌입했다고 보아도 맞을 듯싶다. 그러면 우리 후세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지난날 1세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자식들에게 더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믿음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세계인의 꿈이기도 했다. 1960~1970년대 미국에 이민온 한인 1세대의 아메리칸 드림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이들은 모두 미국에서 중산층 이상으로 끊임없이 도약하려는 전세계 서민들의 역동적인 이민물결에 실려 함께 이민온 사람들이다. 수중에 불과 100여달러와 맨주먹만으로 열심히 일해 10년만에 집을 사고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는 아메리칸 드림 스토리를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보며 살았다. 한인들은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었고,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불과 반세기밖에 안된 지금은 푸드스탬프를 받는 빈곤층이 넘쳐나고 중산층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고전을 면치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아메리칸 드림은 꿈도 꾸기 어려운 실정이다. 1980년대 출생인 밀레니얼세대의 상당수가 대학 졸업장을 갖고도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고, 많은 연구보고서의 통계결과 청년층의 25~50%가 직업이 없는 상태이다. 나아가 코로나사태의 여파로 밀레니얼 세대와 부모들은 더욱 극심한 갈등을 겪고 있다.

대학을 나오고도 부모와 같이 사는 ‘부메랑 세대’ 밀레니얼들은 학자금 빚에다, 치솟은 렌트비 등으로 독립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한 설문에 따르면 연 수입 3만5,000달러에서 9만9,999달러에 달하는 중산층의 경우 단지 37%만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고 응답했다. 나머지는 경기침체에다 코로나까지 겪다 보니 심각한 생활고로 아메리칸 드림에 회의를 느낄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이들에게도 정부의 지원금 분배는 실제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고 보니 ‘아메리칸 드림’은 생각도 못할 가상현실이 되고 있다.

더구나 평생 땀흘려 일군 한인들의 아메리칸 드림까지 물거품이 되는 상황도 발생하고 있다. 흑인에 대한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에 분노한 시위대에 의해 가게를 약탈당하는 등, 한인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점점 더 먼 이야기가 되고 있다. 열심히만 하면 꿈을 이루던 그 옛날은 이제 향수로만 남을 것인가. 아니면 이 암울한 시대가 지나면 또 올 수 있을 것인가. 현재로선 확실한 기약이 없어 보인다.

<여주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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