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도 다 갔다. 갇혀 있다보니 우습게도 자주 가지도 않던 바깥 세상이 그리워지려 한다. 지금은 기도중이어서지만 유행병에 스님 어찌 될까봐 그동안 식구들이 장도 봐다주고 더러 찬도 가져오고 하는 바람에 그나마 자주 가던 홈데포 정도도 나갈 일이 없어졌다. 갇혔다고 문득 생각이 드는 순간, 동물원에 갇힌 뛰쳐나기고 싶은 맹수의 심정이 알아졌다.
이 중과는 달리 사람들은 '비대면 세상'이라는 말을 익숙한 듯 쓰면서 갇힌 세상에 대해 이미 받아들인 것 같다. 누가 가뒀는가도 없이 스스로를 가둔 것이다. 한마디로 세상이 바뀌었다. 펜데믹 이전의 세상으로의 회귀는 불가능하며 돌아갈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것을 대변하듯 인터넷 데이터 사용은 폭증하고 더 편히 갇히기 위해서 집 리모델링이 붐을 이루고 그 속으로 물건을 나르느라 수많은 종류의 배달 차들이 바쁘게 오간다. 소비가 폭등하는 상품들도 집안에서의 삶을 어떻게 편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것들이라고 한다. 또 다른 소비의 시작이다. 자본시장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두려운 부분이다.
지금 저 아름다운 산하는 누구의 것인가. 부디 일부 계층에게만 주어지는 특혜가 되지 않고 자연 스스로의 것이기를 바란다. 더 무성해져서 더 많은 벌레와 식물, 동물들이 편히 다리를 뻗고 활개치며 살길 바란다. 지나친 개발로 숲을 파괴하고, 맑은 공기를 오염시키고, 굳이 오지까지 찾아가 문명의 썩지 않는 물건들을 던지고 오고, 지구를 보호하고 있는 저 대기권을 자꾸 뚫어대고, 굳이 상어 지느러미까지 안 먹었어도...이런 사태는 없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개발이 뭔 잘못이겠는가. 너무 과해서, 인간의 과한 욕심이 문제다. 중도쯤에서 멈췄어야 하고, 도를 넘지 말았어야 한다. 편리에 홀려 공존과 협업으로써만 존재 가능한 생태계의 질서를, 그 일원임을, 우리가 동물임을 잊은 것이다.
지금이 바로잡을 때다. 무소유를 강력히 꺼내 들 때다. '무소유란 안 갖는 게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것은 갖지 않는 것'이라는 법정스님의 말씀이 이미 있었다. 필요에 대한 생각을 전환해야 할 때다. 쉬운 예로 비 하나 피하자고 우산을 비롯, 우리가 얼마나 많은 걸 가져야 했나. 그런데 비는 맞으면 안되는 것이었나? 이렇게 반드시 필요치 않은 것을 정신 차리고 보니 우린 이미 갖고 있었다. 마치 사야할 것 같아서, 남들이 하니까 해야 했던 불필요한 것들, 이제 좀 멈추자. 움직일 동, 물건 물, 동물. 이 '움직이는 물건'은 최소 움직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고 행복한 존재다. 장담하지만 지금 가진 것 반을 버려도 사는 데 지장 없다. 어쩌면 비대면으로의 세상은 노력 여하에 따라 많은 불필요한 것을 줄이는데 획기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두가 갇혀서 남을 의식하는 일이 사라질테고, 욕심은 비교에서 오니까 갇혀 있다면 비교 자체가 불필요하므로 내려놓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지금 이 펜데믹 사태는 저 자연의 질서가 인간에게 주는 기회일 수도 있다. 자연이면서 자연을 해치는 거 그만하고 저 동굴로 들어가 살라고. 알고 계시는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살아 남아 잘 살고 있는 생물들은 강한 놈이 아니라 꽃과 벌처럼 상호 상생과 협업을 하는 존재들이라고 한다. 즉, 상생과 협업이 안되는 존재는 자연의 법칙상 결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는 얘기다. 사람은 어느 쪽일까. 자연과의 상생과 협업을 잘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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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진 스님 (SAC 영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