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칼럼] 엉클 톰의 눈물
2020-06-18 (목)
박상근 목사 (새크라멘토 한인장로교회 담임)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지탱하고 인도하는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대정신이 세상을 밝게 만들고 유익한 경우도 있지만 인간성을 억압하고 세상을 파괴하는 흉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가슴 아프게도 교회가 앞장서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열등한 존재로 여겼고, 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에 더하여 교회가 노예제도를 찬양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그들의 고향에서 납치하여 다른 대륙에 끌고 가서 노예로 팔아넘긴 숫자가 무려 3천만 명입니다.
최근 벌어진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목을 눌러 살해한 백인 경찰 데릭 쇼빈 사건으로 인해 인종차별 시위가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흑인들은 원래 문제가 있어서 그런 박해를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설령 잘못을 저지른 범죄자라고 해도, 심지어 흉악한 살인범이라고 해도 백주 대낮에 사람의 목을 눌려 죽이는 일은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건 잘못이라고 세상에 외쳐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사디크 칸 런던시장은 영국이라는 국가와 런던을 위시한 수많은 도시가 과거에 노예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다는 불편한 진실이 있다 고백했습니다. 영국에서 17세기 노예 무역상으로 악명 높은 에드워드 콜스턴은 혼자서 무려 만 명이 넘는 아프리카 인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아넘겨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 막대한 부로 엄청난 자선 활동을 벌인 업적으로 시내 곳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그가 노예 사업으로 벌어드린 돈을 교회에 헌금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요? 도시 곳곳에 자선 사업을 위해 자기의 부를 헌납했을 때 진정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된 것이겠습니까? 그를 찬양하는 동상이 곳곳에 세워진 것이 진정 명예였겠습니까?
300년 전에 죽은 그의 행적을 부끄러워한 시민들에 의해 그의 동상이 끌어내려져서 밟히다가 강에 던져지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300년 전의 사건이 오늘에 와서 후손들에 의해 부끄럽게 심판당한 것입니다.
노예제도라는 악의 씨앗이 뿌려져서 남은 치명적인 독성을 가진 반인류적이고 반문화적인 죽음의 열매가 바로 인종차별입니다. 교회가 앞장서서 인종차별을 했던 부끄러운 역사를 미국 교회가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회개를 제대로 했을까요?
남북전쟁이 끝나고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해서 노예들이 자유를 얻기는 했지만 흑인을 백인과 차별하여 분리하는 것이 평등이라는 정말 해괴망측한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로 인해 남북전쟁이 끝나고도 150년을 흑인을 차별하는 것이 법적으로 정당화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흑인을 차별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설교했던 것이 미국의 부끄러운 역사입니다. 그 법이 남긴 오래된 시대정신의 관행은 아직도 견고하게 미국 백인들의 정서에 남아 있습니다.
인종 차별을 교회가 앞장서서 지지했던 미국 남부의 교회들은 그들의 과오에 대해 회개했을까요? 그래서 지금은 자유로울까요? 미국의 역사에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았을 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역사에서 이 착취와 파괴와 억압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 심판 앞에서 발가벗겨질 날이 올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인종차별에 앞장서고 있는 백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특히 인종차별이 정당하다고 가르치고 있는 미국 남부의 일부 교회들에게 그리고 정치 지도자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그들의 결말에 대해 하나님께서 뭐라고 심판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쌓아올린 정치적인 업적, 사회적인 업적이 도대체 어떤 가치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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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근 목사 (새크라멘토 한인장로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