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등] 평 등
2020-05-28 (목)
동진 스님 (SAC 영화사 주지)
얼마전 지나던 불자가 모종 하나를 떨구고 갔다. 호박인줄 알고 키웠는데. 자세히 보니 오이다!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절대로 아래로는 퍼지지 않던 이유를 비로소 알고, 많이 미안했다. 철사를 가져다 지지대를 만들어 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쑥쑥 큰다. 같은 채소류라도 성질이 다 다르다. 당연하다. 그래서 토마토도 고추도 오이도 호박도 감자도 아욱도 얻을 수 있다. 물론 여러가질 키우면 물주는 양, 그늘 양, 거름 양, 지지대 등 신경써야 하는 수고로움이 더 많이 따른다. 그런 것이다 세상은. 뭐든 갖고 싶으면 그에 따른 수고로움도 같이 떠안아야 한다. 그 수고로움이 싫다고 나만을 주장하는 이도 세상엔 많다. 당연하다. 그런 이도 다양성 속에선 용납이 된다. 그게 평등성이다. 모두가 평등을 똑 같아야 함으로 오해한다. 그래서 차별에 대한 시비가 붙으면 여자도 군대를 가라느니, 그럼 남자도 츨산을 하라느니, 즉물적으로 대처하기도 한다. 그런 곳에다 기반을 두고 평등을 논할 수 없다.
평등은 황새다리 뿌질러서 참새다리에 붙이는 게 아니다. 황새와 참새의 존재이유가 같다는 것을, 하나로 이어진 생명, 임을 아는 것이다. 뭐든 같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인종간의 평등은 외적 요인으론 절대 같을 수 없고, 다름을 받아들이는 게 전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남녀 평등 역시 신체적 기능이나 생긴 모양을 가지고 똑같아 지자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평등이다.
'세상 두두물물은 모두가 다 같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 하나가 되자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이지만 눈은 눈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달라야 한다. 각기 다른 것들이 모여 하나로 움직이는 것이다. 눈만 중요하고 다리는 안 중요하고가 아니다. 모두가 팔이 되어도, 모두가 눈만 되어서도 하나가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죽어라 같아지려고 하는가. 같지 않다고 미워하고 차별하고 폭력을 행사하는가. 왜 같아지려 같은 차를 사고, 같은 옷을 사고, 같은 미래를 꿈꾸고, 유행을 따르고, 남이 먹는 것을 먹으려 하고, 남이 간 곳을 가려 하면서, 괴롭게 사는가. 왜 남들 하는 건 다 하려고 하고 못하면 서럽다고 하는가. 중요한 건 그 장소가 어디든 같아 지는 사람이 많으면 통제하기가 쉬워진다는 거다. 통제하는 이의 지배력을 강하게 만들고, 통제 당하겠다는 암묵적인 허락을 하는 일이다. 같아져야 한 쾌에 통제가 가능해진다.
그런 통제가 필요한 공간이 있다. 한시적으로. 그 외엔 언제든 우린 자유롭게 고유여야 한다. 그것이 지혜롭게 사는 요건이다. 그 고유함으로 사회 구성원이 되고, 다양성과 유연함이 있는 삶을 꾸릴 수 있는 것이다. 남이, 혹은 자본이, 혹은 권력이 통제를 쉽게 할 수 있는 저 '남들처럼' '남과같이'에 매이지 말기 바란다. 그래야 자유롭다. 유연성을 가져야 바람에 꺾이지 않는다. 그 유연성에서 타인에 댜한 배려가 나온다. 흔히 갑질이나 인종차별, 성차별 등도 그 폭력을 가능하게 하는 유연하지 못한 불평등 사상에서 나온다. 나와 다름을 못 받아들이는 거다. 다름에 걸리지 않는 마음이 평등성이다. 코비드 19로 인하여 불평등한 차별의 소리들이 유연하지 못한 행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또한 나와 정말 다른 이와 집안에 오래 갇혀 있는 중이다. 마음 공부하기 좋은 때다. 묻는다. 다름이 없다면 '나' 는 나일 수 있는가?
<동진 스님 (SAC 영화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