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코에 화장실 휴지가 동이 났다는 소리가, 한국 식품점에 쌀이 동이 났다는 소리보다 먼저 들렸다. 에센셜 Essential 이라는 단어의 뜻이 뭔가. 한국어 사전에는 근본적, 기본적, 필수적, 본질적, 극히 중요한 …이라고 나와 있다.
화장지? 3월 초에만 해도 꼼짝 말고 집에 있으라는 명령은 없었을 때였다.
‘그래? 미국사람들에게는 화장지가 그렇게나 중요한 가보다. 무슨 사태가 벌어지면 화장지부터 챙겨야 하는 거네’ 했다. 정말로 그 거대한 코스코에 가서 텅텅 빈 선반을 직접 볼 때 가슴이 선뜻 했다. 아니, 화장지가 삶의 필수적 요소란 말인가.
한국에서는 70년대 까지도 돌돌 말린 화장지가 별로 없었다.
학교 앞 다방에서 한 남학생이 두꺼운 종이 한 장을 주면서 반으로 접어보라고 했다. 틈만 있으면 다방에 모여 음악 듣고 놀던 그런 시절이다. 종이를 반으로 반듯이 접어서 주니까, 쓱 펴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주면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또 반으로 접으라고 했다.
무슨 점을 봐주는가 하고 종이의 네 귀를 맞추어 잘 접었다. 이렇게 자꾸 접어서 더 이상 접을 수 없게 작아지니까...그 남학생이 고맙다고 하고는, 그 종이를 막 구겨 가지고 화장실로 뛰어갔던 일이 눈에 선하다.
화장지라니… 고급스런 말이었다. 화장실이란 말도 없었다. 추운 겨울 방에서 나와서 신을 신고 마당에 있는 변소를 가는 일은 고역이었다. 여름에는 냄새 때문에.
공동변소에 휴지가 걸리기 시작한 것도 한참 후다. 5,60년대에 태어난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 학교마다 변소에는 귀신이 있고, 소풍을 간 절간의 깊은 변소에 빠질까봐 조심했다. 영화 슬럼덕 밀리온에어에서 본 인도의 상황, 그것이 한국의 현실이었다.
처음 미국에 오자, 어딜 가나 너무나 흔한 휴지에 놀랐었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하나 사도 봉지에 케찹 한 주먹에다 휴지를 한 뭉치 푹 집어 넣어줘서, 집에 와서 남은 것을 아주 유용하게 썼었다.
커피 한잔을 사도, 그 옆에 설탕과 휴지가 통째로 놓여 있으니, 유혹에 못 이겨 한 뭉치씩 가져와, 집에서 친구랑 커피를 마실 때, 너 무슨 설탕 줄까? 맥도날드? 버거 킹? 던킨? 했었다. 갓 한국에서 온 소식쩍 이야기이다.
어느덧 풍요로운 미국 문화에 젖어 들어, 화장지를 사더라도 보드랍다든지 보기에 예쁘다든지 보다 좋은 것을 찾게 되었고, 미국사람들은 손에 둘둘 말아 쓰던 두꺼운 페이퍼 타워를 반씩 잘라서 썼었는데, 그냥 훅 뜯어 쓰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9.11 때 보다 더 무서운 이런 사태를 맞이했다.
그러나 화장지라니… 사람들이 수퍼마켓이 화장지가 없어서 겁에 질려 허둥댄다고 해서 웃음이 났다. 플러시 문제를 해결하고 머리만 좀 쓰면 화장실 종이는 얼마든지 해결된다.
코로나 비상사태에, 한국 촌뜨기 경험을 되살려, 앞으로 다가올 경제공황에 대비한다. 화장지 걱정 말고, 맛있는 것 좀 덜 먹고, 물은 끓여 먹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가고, 이제부터 내핍생활하고 주변을 항상 깨끗이 하면서 살아낼 마음 준비가 넉넉히 된다.
세상이 좀 있다 끝난다고 하자.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에센셜 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면서 우리 집 화장실에 걸려있는 이 귀중한 토일렛 페이퍼를 의미 있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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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려/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