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비문불망기(卑門不忘記)

2020-03-04 (수) 박사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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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신이 아니다

▶ 독자·문예

갯버들 오는 봄 알리는 이른 아침
잠들 수 없는 노부는 서창에 서서
밝은 햇빛이 하늘의 충계를 걸어내려와
잿빛의 숲에 깃든 생령들을 일깨워 놓고
어둠의 경계선을 지우고 어디로 가는 지 알 수 없으나
나는 사라진 비문의 불망기를 생각한다
이는 조선왕조 연산주에서 명종조까지 오십년
유림의 사문(斯文)난적 젊은 신진사류를
도륙한 사대사화로 한 청사문(淸士門)이
멸문지화한 비탄의 통사다
혈흔이 점철된 혈손(血孫)의 불망기 행방을
대를 이어 문중에 전해 내려온 사백년, 구전의 전설
몇 개의 철괘 안에 비장한 실화를
이제야 현손은 이름 찾고 있음이랴
그 시대, 정암의 도학정치 개혁사상은
변증법적 이상과 현실의 이중성은 없었는지
지금에 알 수 없으나 사림의 혈맥을 끊어버린 죄악
기묘사화로 조상의 자손은 두메 묻힌 벽세(僻世) 살이
한소(寒素)한 모옥에서 후손이 되어 환생한 이 숙명을
몰락한 세가의 무거운 멍에를 진 목마른 자여
호젓한 벽촌 갯가에 혈육 한 점 홀로 떨어져
사조(沙鳥)와 고독의 운명을 즐기시는가
빈자의 주기도문이 잠시 머물다 간 고요 속에
우울한 하늘은 한바탕 일진광풍 휘몰아
한순간 천공이 열리는 광휘에서 나는
신령의 태화(太和)를 받았음인가
윤회를 생각하며 밤마다 일문(一門)의 부활을
설계하는 꿈 속에서 모르페우스와 함께
빈자와 부자가 하나 되는 새 세상의 역사를 준비하네
생의 부조한 생활의 틈바구니에서도
살아야 한다는 다짐, 소금기 저린 갯바람에도 보람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그들의 자손, 빈소(貧素)한 사민과
하층민은 하루 분의 사조(士操)와 빵 하나로 오늘도
빈 그릇의 굶주림을 채우려는 자유와 평등과
정의, 창조의 혁명을 가슴 속에 품는다

* 사문난적: 한 스승에 배운 유교사상에 배치되는 언동을 하는 이를 배척하는 뜻
모르페우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꿈의 신
비문: 자기 가문을 낮추는 겸손

<박사농/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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