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쓰는 속담 중 ‘색안경을 끼고 본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선입견에 가려 사물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각기 자신의 업(業)에 따라 자신의 의식세계에 상응되는 수준의 색안경을 끼고 산다. 붉은 빛이 들어간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 나무도 붉은 빛을 띠고 옆 사람의 얼굴도 붉은 빛을 띠어 보인다. 불교에서 우리가 수행하는 목적 중 하나는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중생은 모든 것을 자기 관점에서 이해하고 판단하기 때문에 좀처럼 분별의 색안경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붉은색안경에서 푸른색안경으로, 또 푸른색안경에서 노란색안경으로 안경의 색상만 바꿔 끼고 있다. 마치 ‘모든 것은 운명이다’라는 운명론을 가치관으로 가진 사람이 ‘모든 것은 우연히 이루어졌다’는 우연론으로, 사회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이 자본주의의 관점으로, 끼고 있는 색안경의 색상만 바꾸었을 뿐 여전히 자신의 색안경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참선이란 부처님의 관점을 내 관점으로 하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이 말은 내가 끼고 있는 색안경, 즉 중생의 안경을 벗어버리고 부처님의 안경, 즉 부처님의 관점에 의지해 세상을 바라본다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 의아함을 느끼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수행의 목표란 색안경을 벗어버리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인데 무슨 부처님의 안경이 있을 것이며, 색안경을 벗어버리면 그뿐이지 부처님의 안경이 왜 필요할 것인가? 하는 의아심이 들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습관적으로 어떤 관점에 의지해 세상을 바라본다.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한다.’는 보조스님의 말씀처럼 우리 중생은 색안경에 의지해 세상을 바라보는 습관 때문에 바로 색안경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가상(假想)으로 상정된 부처님의 안경에 의지해 고 공 무상 무아(苦,空,無常,無我)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통해 본인이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자각하고 결국은 가상(假想)으로 상정된 부처님의 안경마저 벗어버림으로써, 온전히 세상의 진면목을 바로 보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옛날부터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즉 물(水)이라는 같은 대상을 바라봄에 있어 천상사람들은 그 것을 보물이 가득 찬 연못으로 보고, 인간들은 다만 물로 보며, 아귀는 이것을 피고름으로 보고, 물고기는 사는 집으로 본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똑같은 환경도 보는 사람의 처지에 따라 이와 같이 전혀 달리 보인다는 의미이다.
사회의 갈등은 보통은 사회구성원간의 가치관의 충돌과 이해관계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판단의 기준이 남과 다를 수 있고, 나아가 대나무 숲의 뿌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겉으로 보기엔 독립된 존재 같아 보이지만 서로 의지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된다면 벌써 갈등의 절반쯤은 저절로 해소되지 않을까?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의식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각기 서 있는 위치가 다름에 따라 눈에 보이는 풍경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적대시하고, 그 갈등이 전에 없이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 요즈음이다. 부처님의 지혜로 슬기롭게 극복해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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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전 스님 / SF여래사 주지>